억울하게도 청소년인 나는 서명을 받을 자격이 되는 수임인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리에서 서명을 받을 때는 언제나 수임인의 보조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청소년은 서명을 해도 효력이 없다니, 참 화나는 일이다. 당사자는 쏙 빼놓고 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 상황 속에서도 어쨌든 모든 것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10월 말에 시작한 서명운동은 그렇게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2월 초순부터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일주일에 하루 정도의 휴일을 제외하고는 아침 11시부터 저녁 5시까지 거리에서 서명을 받는 살인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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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서명, 고도의 심리 기술 마스터하기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30초만 서명해 주세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차별과 폭력이 사라질 수 있도록, 잠시만 시간 내셔서 서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건, 교사도, 학부모도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을 너무나도 싫어하는, 19살 청소년인 나는, 입춘이 한참 지났는데도 멈출 생각을 않는 칼바람을 맞으며 3시간째 이 멘트를 되풀이 하고 있다. 학부모나 아주머니들은 ‘우리 아이들’이란 말을 좋아한다. ‘차별’이란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두발복장자유’라는 말은 엄두도 못 내고, ‘체벌금지’라는 말은 ‘폭력을 없애자’는 말로 대신한다. 그러면 실제로 ‘학교폭력’이라고 흔히 불리는, 학생 간 폭력 방지하자는 얘기인줄 알고 서명하기도 한다. 속으로 ‘뭐, 포함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하고 생각하며 웃음이 나오지만, 웃기는 너무 우울한 현실이다.
주민발의 서명에는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해야 한다. 이것도 사람들이 서명을 하기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다.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는 칸에서 멈칫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지방자치법에 의거한 거고, 서울 주민이신지 확인하는 데만 쓰이고, 데이터를 남기는 게 아니라 종이 째로 시의회에 전달되고 등등 구구절절 절대로 유출되지 않음을 강조해야 한다. 이때는 정신 바짝 차리고 절대로 말을 더듬으면 안 된다.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방자치법에서는 주민발의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어떤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 받고 있는 서명에 주민등록번호를 흔쾌히 써 줄까? 서명 검토는 이름과 주소만으로 가능하다. 물론 주민등록번호가 있으면 더 편하겠지만, 결국 공무원들 편하라고 우리는 고생고생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고 있다.
거리에서 ‘학생인권’이 거절당하는 이유들
여기까지는 모두 전단을 보고 한 번이라도 멈춰 선 사람들의 경우이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서명을 하기 위해 펜을 들어주셨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기에 설명되지 않은, 학생인권 조례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찾아 읽어보고, 공감해서 선뜻 서명을 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며 서명용지를 받아간, 그야말로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아름다운 사람들도 몇 안 되지만 있었다.
서명을 해 주신 분들의 몇 십 배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원천무시하거나, 투명인간취급하거나, 가끔 어떤 분들은 “애들은 맞아야 돼.”라는 어이없는 멘트의 설교를 한다. 지금 바빠요, 시간 없어요, 라며 지나가는 사람들, 원망하면 안 되는 건 안다. 그 사람들은 지금 1분의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거니까. ‘괜찮아요’라면서 전단지를 거절하고 말을 자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울고 싶어진다. 저는 안 괜찮아요. 고등학교를 그만 두기 전, 한자교사가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애들 등짝을 패면서 “등이 성감대거든, 다른 데 때려줄게.”라고 말했을 때의 모욕감과 분노를 잊을 수가 없어서 안 ㅤㄱㅙㄶ찮아요. 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학교’는 드디어 출소한 감옥이고, 다시는 꾸지 않을 악몽이기 때문에 다시 그 실태를 듣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지금의 학교는 그렇게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 안에서는 자신의 불행을 표현할 수조차 없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명!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 정말 냉정하게 판단해서, 망해간다. 서명 숫자는 결과를 예측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운동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내 안을 들여다 보면서 나오는 결론은 ‘망하게 할 수는 없다’이다. 나는 아직 거리에서 눈길을 주는 사람들을 믿고, 펜을 드는 사람들의 손을 믿으며, 신문의 작은 기사 한 줄, 짧은 뉴스 보도 한 장면에서 걱정하거나 분노하는 사람들을 믿는다. 그리고 조금 더 바라도 된다면, 그 사람들이 주변 한 사람에게 더 말을 하고, 우리에게 서명을 보내오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란다. 내가 하고 싶은, 그리고 지금 해야 할 한 마디는 간결하고 명확하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여러분들의 서명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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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둠코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