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길을 떠났다. 길은 황폐화된 지 오래이다. 예전에는 강변으로 울창하던 물풀들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만 계속될 뿐이다. 덕분에 올 봄에는 산란실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산란실을 찾은 뒤에도, 물의 온도가 맞지 않아서인지, 산란이 쉽지는 않았다. 몇 해 전이었던가, 하류 쪽에는 그나마 산란을 할 수 있는 인간적인 구조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물풀을 찾아 산란을 할 수 있는 우리는 사정이 낳은 편이었다. 옆집 살던 각시붕어는 모래 속 말조개에게 알을 낳는데, 올해는 모래도 말조개도 보이지 않아 산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이 시작된 지 며칠. 올해 태어난 어린 녀석들이 힘들다고 투정이다.
“어디까지 가야되는 거예요?”
“살만한 곳을 찾아야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단다. 세계는 구비구비 둥글둥글한 모양이었어. 세계가 둥글어지는 곳에서는 물살이 느려지면서 작은 호수가 생긴단다. 우리들은 그 호수를 소(pool)라고 불렀지. 반대로 물살이 빨라지는 곳은 수심이 얕고 하늘이 보이는 여울(riffle)이 생긴단다. 물살이 느린 소에는 모래가 많이 쌓이고, 여울에는 자갈이 쌓이지. 그 자갈 위에서 춤추는 물방울들 정말 아름다웠었는데. 그네들이 춤을 출 때 산소가 많아지곤 했어. 산소는 바깥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거든. 여울이 먹을 것도 많고 참 좋았어. 햇볕이 들어와 광합성을 하는 이들이 있었거든.”
“와, 그럼 우리 여울을 찾아 가고 있는 거예요?”
“여울도 있고 소도 있어야지. 여울은 물살이 빠른지라 밤이 되면 물살이 느린 소를 찾아가 쉬어야 돼. 어떤 친구들은 모래가 많은 소를 더 좋아한단다. 소에 쌓이는 모래에는 동물성 플랑크톤이 풍부하거든. 또 모래무지라는 친구는 아예 모래 속에서 살아갔는데.”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는 물살마다 이름도 다양했다. 샘솟고, 찰방대고, 졸졸거리고, 흐르고, 쏟아지고, 찰랑이고, 굽이치고, 잔잔하고, 넘치고, 첨벙거리고, 스며들고, 휘돌고, 넘실대고. 이 물살들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요즘 세상은 참 단조롭기만 하다.
“앞에 뭐가 있어요!”
앞서가던 젊은이들이 소식을 전해왔다. 기대 반 걱정 반. 지느러미질에 박차를 가했다. 물살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 거대한 소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를 지나면 여울도 나오려나. 그런데 무언가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물도 흐르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세계의 끝인가. 우리 말고도 다른 곳에서 온 무리들로 거대한 소는 몸 가눌 틈이 없었다. 다들 비슷한 사정으로 살 곳을 찾아 이동 중인 듯 했다.
부족간 대책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마땅한 대책은 없었다. 어떤 이는 다시 날이 따뜻해질 때 세계의 끝 한 쪽으로 물이 넘쳐 길이 생길 것 같으니, 그 때 다시 돌아오자고 했다. 그러나 저 곳을 넘어가면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샛강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많이 가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하고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세계의 끝에서부터 무언가 시작된 듯하다. 모든 것이 휩쓸려 가고, 공포가 몰려왔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미처 피하지 못한 많은 친구들은 바깥세상으로 고립되어 버렸다. 정말 순식간에, 세계의 끝, 거대한 소는, 공동묘지가 되어버렸다. 살기 위해 이곳까지 왔는데, 결국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죽음이었단 말인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나?
정부는 10월 22일 ‘4대강 살리기’가 완공되었다며 대대적인 동원행사를 했지만, 바로 그 다음날인 23일 오프닝 행사가 있었던 낙동강 강정보에서는 수천마리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수천의 생명이 사라졌건만 이름도 없이 그저 ‘물-고기’로 불릴 뿐이고, 각기 고유했던 삶들은 구별되지 못하고 ‘떼-죽음’으로 기억될 뿐이다. 혹은 망각될 뿐.
덧붙임
승욱 님은 두물머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