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몸값을 올리기 위해 대거 ‘잘 팔리는’ 학과로 전과하는 친구들을 보며 들었던 먹먹함(난 ‘안 팔리는’ 과였다), 처음 집을 구할 때 이미 어떤 남성이 살고 있는 어두컴컴한 반지하 집을 보며주며 “방은 따로 쓰니 상관없잖아. 이만한 곳 구하기 어려워!” 자신만만한 집주인의 말에 황망했던 그 순간, 목소리도 몸도 바들바들 떨었던 첫 임금협상 후 마신 술의 씁쓸했던 맛, 멋대로 들락거리며 온갖 간섭을 해대는 집주인을 만나 내 집이 내 집이 아니었던 설운 기억...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도 어설픈 자기위안을 하거나 다들 그렇다고 냉소하거나 그 감정에 침몰되지 않게 애써 외면하면서 그냥저냥 넘겨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기억이 화석처럼 굳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순간들과 다시 만나 겹쳐지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곤 했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것이라 승인해주는 인생의 정규코스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애초부터 정규코스에 진입할 수 없다고 배제되는 사람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정규코스에서 이탈한/된 사람들이 있다. ‘비정상’적인 이들에 대해 가난해서, 이주민이라서, 여성이라서, 장애가 있어서, 게이라서, 자퇴해서, 나이가 어려서, 비정규직이라서, 결혼을 안 해서 등등의 이유를 가져다붙이며 차별은 정당화된다. 내 존재를 부정당한 순간,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먼저 움츠렸던 상황, 부당한 게 분명해도 그냥 참고 넘어간 경험. 사람은 존엄하다는 말은 그저 말일 뿐, 헛헛함을 느껴야 했던 경험은 각자 저 스스로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남아 성토대회라도 된 듯 술자리에서 쏟아내는 레퍼토리가 되곤 한다.
‘내가 ~해서 그렇지’, 이 사회에서 차별의 기제가 되는 딱지를 그대로 가져와 붙이며 순간순간들을 넘겨왔지만, 그렇다고 말끔한 것은 아니었다. ‘을’들의 이어말하기에 함께 한 사람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우리의 이야기로 만난 찰라들은 더 자주 더 많이 서로 마주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그렇게 같이 만나는 시간들이 “그저 각자의 경험일 뿐 오롯이 저 혼자 감당할 몫”이라 말하는 이 사회에 날리는 하이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딱 구분되기 쉬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낼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건 약함이나 가벼움으로 치부되는 것 같고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을’로서의 내 위치성을 재확인하는 것 같아 유쾌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이건 솔직한 마음은 아니었다. 누구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뻔한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문제는 어떤 것을 나누고 싶고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가-였다. 이 사회가 말하는 인생의 정규코스를 내가 밟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원하고 만들고 싶은 관계와 세상에 대한 성찰을 별로 해본 적 또한 없었다.
불리고 싶었던 이름으로 서로 불리고 뭉쳐져 있던 감정의 결들을 펼쳐 보이며 우리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것, 평등한 관계에 대한 꿈을 말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러한 관계를 맺고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다른 질서를 향하게 할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건네며 만나는 시간은 서로의 삶으로의 초대이다. 그 시간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기도 하고, 다른 내일을 함께 만들어내자는 다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초대가 곳곳에서 펼쳐지면 좋겠다. 함께 모이고 만나는 순간들이 쌓이면서 맛볼 어떤 환희를 바라본다.
** ‘을’들의 이어말하기에서 나눈 이야기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블로그 http://ad-act.net/에서 볼 수 있다.
덧붙임
민선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