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정운 씨의 그 말을 믿는다. 박근혜 정부나 법원 상부의 정치적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신을 굽혀 판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로 인정된 증거들이 왜 내란음모죄를 구성하는지 굳이 법리를 제시하며 설명할 필요를 못 느끼는 '상식'은, 국가보안법 7조 위반으로 기소된 표현들이 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인지 설명할 필요를 못 느껴온 남한 법관들의 '상식'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검찰이 이적․반국가단체로 기소조차 못했으니 변호인단은 다툴 필요가 없다던 RO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적성 여부에 관심 없으니 변론하지 말라던 '진보적 민주주의'를 대남혁명노선에 따른 것이라고 규정하며 중형을 선고한 것1)2)만큼은, 국정원이나 검찰, 박근혜 정부와는 상관없이 오롯이 1심 재판부의 독립적인 기여다.
사건 처음의 충격과 공포가 가시며, 또 공판이 진행될수록 국정원의 무리수와 증거부족이 여실히 드러나 온 것들을 지켜보며, 말들이야 낙관할 수 없다면서도 어떤 기대감이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판결 이후 다시 돌아서는 걸 느낀다. 나부터 그랬다. 인권침해보고회에 참가하여 구속자 가족들과 압수수색 당사자들의 말을 직접 들으며, 국정원이 언론을 통해 투사한 '상'이 현실에서 어긋나는 모양새를 구체적으로 감지해왔음에도, 다시 흔들렸다. 1심 재판부는 왜 저런 판결을 내렸을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반응할까를 묻기에 앞서, 나 자신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1
내가 그들이 무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지 내란음모가 실행에 옮겨지거나 실행에 옮기려 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다. 실제로 현실에 존재한 실천들이, 5월 모임은 전쟁 반대를 위한 자리였다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던 작년 3월부터, 문제의 모임이 있었던 5월을 거쳐 사건이 터진 8월까지, 이들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진보당의 홍성규 대변인은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작 제가 공포심을 느꼈던 것은 한국전쟁 이후 군사적 긴장상태가 최고조에 달해 있는데도 아무도 ‘평화’를 호소하지 않는 기이한 현실이었습니다. 되레 정부와 새누리당,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전쟁불사’를 외쳤습니다. (…) 실제로 미국은 북한의 전략적 도전에 맞서 도상(圖上)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올봄 한반도 상공에는 전략폭격기, 최신 전투기가 출현했습니다. 바다에는 핵 잠수함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항공모함만 뜨지 않았을 뿐, 미국이 갖고 있는 모든 핵전력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이석기 의원은 이 군사적 대결이 미국의 북한 침공과 제2의 한반도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무 근거 없는 낙관이 무슨 과학적인 입장처럼 인정받고 있습니다." - 진보당 홍성규 대변인 3)
작년 상반기가 정말로 전쟁 위기였느냐는 토론의 여지가 있겠으나, 적어도 최근 몇 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예전과 다르다는 건 누구나 느끼고 있지 않을까. 이 시기 진보당과 한국진보연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등은 평화체제와 반전을 요구하는 집회와 길거리 캠페인 등을 소위 '빡세게' 진행했다. 비웃을 일일까.
5월 정세강연회 이후 사건이 터진 8월 말까지, 국정원이 주장하는 내란 음모가 준비되거나 실행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국정원 또한 내란을 진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바 없다. 그 시기에도 이들의 반전 행동은 평화대행진 등으로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5월 모임의 성격은, 몇몇 돌출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전쟁 위기의 정세를 공유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결의를 모으는 자리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5월 모임에 참여했던 또 다른 사람의 말이다.
"회합 당시에 별 얘기가 다 있었던 거죠. 근데 가장 핵심은 그 시기가 전쟁 위기 국면이었고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기본 인식은 그거였던 거죠. 전쟁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각성이 있었어요, 그 모임을 통해서. 왜냐하면 실제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근데 전쟁이 만약 일어났을 때 그걸 가장 깊이 각성하게 된 것은, 내 운명이 걸려있다는 거였어요. 전쟁 국면이 되면 소위 예비검속이 가장 관심거리였어요. 만약 진짜 전쟁 나면 우린 뭐할 건데? 말로는 전쟁 정말 위험하고 전쟁이 나면 막아야 돼 했지만 실제 아무런 대책도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전쟁이 난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을까, 전기 통신 다 끊어지면 우린 서로 연락도 못할 텐데 어떻게 소식을 전하지? 이런 상상들..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현실적인 문제인가 하는 게 핵심이었는데. 소위 진보 운동 평화운동 한다는 사람이 이에 대한 대책이 있어? 전쟁이 구체화되는 시점에 우린 뭐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비상식량 뭐 이런 얘기들이 나왔던 거예요.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어 진짜 어떻게 하지?’ 이런 거였던 거죠. 나름 진지하긴 했지만, 그 진지함의 초점은 우리가 전쟁의 위험에 대해 무뎠다, 국가가 지금 위기에 있는데 우린 너무 관념적인 거 아닌가, 각성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 주제의식에 동의를 했던 거고요. 하고 나서도 집에 가서 TV 보고 깔깔대고 웃고 했어요.
또 하나는, 그 이야기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준비된 내용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거기서 처음 던졌고 그런 고민을 그 시간에 처음 해보니까, 사실은 짧은 시간에 별 얘기가 다 오갔던 거예요. 피난가야 되는 거 아니야, 이동은 어떻게 하지, 잠은 어디서 자야 하나…같은 것들. 그런 면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임이었다 생각하는 거죠." - 5월 정세 강연회 참가자
5월 정세강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전쟁은 TV 속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닥치는 현실일 수도 있다는 자각을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특히 근 20년 이상 경찰과 국정원, 기무사의 집중적 사찰을 받아왔던 이들이 남한의 현대사에 선명히 얼룩진 국가폭력을 예사롭지 않게 떠올렸으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즉자적으로, 돌출적으로 나온 센 말들에 당혹하는 만큼, 그이들이 삶에 늘 드리워져 있던 그늘에도 주목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발언들이 그 자리에서 강연자와 다른 참석자들에게 만류, 비판받았다는 점4)을 구태여 환기할 필요도 없다. 말이 아니라 실천이 입증한다. 5월 이후 존재했던 평화 체제를 요구하는 실천들, 아니 실은 그 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흘러왔던 실천이.
#2
그렇게, 5월 모임의 실체는 한반도에 새롭게 구조화되고 있는 전쟁의 위협들을 구체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인식과 결의를 모은 자리였다는 인식에 변함이 없었음에도, 나는 1심 판결을 접하며 다시 흔들렸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보장의 원칙 대신, 입증되지 못한 의심과 어떤 '상식'에 근거한 잘못된 판결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런데 왜?
판결이 거듭 적시한 '센 말'들, 애초에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그 말들이 나를 동요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세계에 대한 관념적 인식 아래 관념적인 평화를 주장하는 흠잡을 데 없는 말보다, 설령 흔들리더라도, 두려운 '직면'의 순간들을 통과하며 나온 평화적 실천이 더 신뢰할만하다 생각한다. 국가폭력이 드리운 그늘 아래, 삶의 반려자에게도 말 못할 불안을 품고 살면서도 폭력의 악순환으로 퇴행하는 대신, 늘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길을 택하려 애써왔다는 점이 더욱 존중할만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나를 두렵게 만든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저항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지만, 그것은 근원적 복종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국가에 적대의 뜻을 품은 이들은, 그게 어떤 맥락이었든, 영원히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너는 국가에 복종하는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아마 높은 법대 위의 법관들이 품었을, 반드시 확인하고자 했을 의문일 것이다. 총구와 피의 냄새가 나는, 타인을 시험에 들게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예비된 질문이기도 하다 - 내가 동요한 이유다. 우리는 애초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폭력의 뿌리는 어디에 있나.
인간은 연약하다. 국가라는 거대한 물적 폭력 앞에선 누구라도 그렇다. 그런 국가가 옛 야만의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시대에 발맞춰 큰 위화감 없이 재무장해가는 것을 우리 모두 목격하고 있다. 인간이 제 존엄과 생존 사이에서 시험에 들기를 요구하는 이 시대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 그 질문을 더욱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지 않을까. 이미 그 질문을 통과하여, 국가가 집요하게 요구하는 특정한 맹목을 거부하고 스스로 관찰하고 생각하며 자기만의 답을 찾아가고 있는 이들, 그래서 국가의 혹독한 보복을 받고 있는 이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는 말, 그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은 귀하다. 생각이 서로 다를 뿐, 서로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 또한 그렇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말 충분할까. 누군가들의 문제의식을 삭제한 채, 사상의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도태’를 전제로 관용한다는 건 노골적인 폭력보다도 더욱 뒤틀린 것 아닐까. 세계 최고로 요새화5)된 땅에서 태어나 자라며 형성 받은, 내 안의 어떤 인식적, 심리적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지 않고서 과연 타인의 문제의식을, 실천을, 세계를 조금이라도 투명하게 볼 수 있을까.
공판 날짜 별 핵심 내용 발췌 (요약․보완)6)
1)[사설] 검찰 공소를 받아 쓴 ‘내란음모’ 재판부, 민중의 소리.
2)홍성규 “검찰조차 기소 못한 ‘RO', 판결문에서 부활해”. 민중의 소리.
3)「국정원 내란음모 조작사건 진실보고서」2013. 진보당
4)「내란: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의 모든 것」 3.2 5월 12일, 이석기가 말하려 한 것
5)“우리나라 기간망은 전 세계에서 가장 견고하다 (…) 우리나라는 국가핵심기관 보호기능이 너무 중첩되어 있어, (정부의 방호태세를 마비시키려면) 특전사 3개 여단 이상, 각종 무기 및 물자, 수 만 명 이상 지원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31차 공판, 전 국방부 장관 정책보좌관 김 모 씨
6)「아무도 우리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 소위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인권 침해 보고회」 자료집, <참고자료 2> 회차별 재판 경과, 2014
덧붙임
유성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