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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이야기.

‘함께’의 가치

내 삶은 무언가 결정적인 게 없었다. 특목고가 아닌 대안학교를 선택했을 때도, 처음 청소년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밀양에 처음 갔던 것도 분명한 이유가 있던 게 아니었다. 항상 ‘어쩌다 보니’ 그곳에 가게 되었고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 그 속에 내가 있었다. 그런 ‘어쩌다 보니’ 인생 속에서도 특별히 기억나는 몇몇의 순간들이 있는데 처음 학교를 자퇴하던 순간과 처음 녹색과 탈핵을 접했을 때의 기억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녹색․탈핵 운동이 처음 나에게 ‘다가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가게 된 밀양에서 송전탑의 위험과 탈핵의 필요성을 말하는 주민들을 만났다. 여태껏 나와는 상관없다 생각했던 녹색과 탈핵이 그들을 통해서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전에도 탈핵이 필요하다는 말은 여러 번 접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혹은 예쁘고 착하고 이상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해 들은 녹색과 탈핵은 그저 예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녹색과 탈핵은 절박한 현실이었고, 생명이었고, 또 자신의 삶에 당면한 과제였다.

밀양의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많은 보상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냥 그대로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몇 십 년간 한 동네에서 살아온 이웃들과, 밤나무와 감나무와, 자신들이 키우는 깻잎, 돼지들과 ‘함께’ 살고 싶을 뿐이다. 어느 순간 나도 그 동네가 마음에 들었고, 그들과 정이 들어서 ‘함께’ 하고 싶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녹색․탈핵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녹색의 가치는 바로 이 ‘함께’이다. 나 혼자 잘 살자고 핵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꽂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감나무가, 돼지들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함께’라니, 그저 예쁘고 착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함께’가 녹색운동의 핵심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유한하기에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분배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유한한 지구를 지속 가능하게 이용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녹색운동이다. 이번 녹색운동 진영과 청소년운동 사이의 논쟁이 바로 이 지점, 유한함과 지속 가능함의 고민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우리는 미래 세대라고 불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에게 오염된 자연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들은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지구에서 살 권리가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맥락으로 환경운동(특히 탈핵운동)에서 사용하는 구호가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다. 나는 그들이 사용하는 구호가 어떠한 맥락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핵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그들의 진심을 왜곡하고 싶은 생각 또한 없다. 다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우리 아이들’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언어는 힘이 세다. 말과 글은 우리의 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더 나아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만든다. 그 예로서 ‘장애우’라는 단어를 한번 살펴보자. ‘장애우’는 장애인들의 주체성이 삭제된, 그들을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담긴 언어다.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자신을 ‘장애우’라고 칭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장애우’라는 단어가 친구라는 뜻을 가졌기에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1인칭 명사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장애우’는 그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장애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장애를 가지지 않은-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당사자가 아닌 타자로서만 존재하는 단어이기에 장애운동 진영은 (투쟁의 당사자로서 장애인을 배제하는) ‘장애우’라는 단어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장애인 당사자가 시혜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고 투쟁의 주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이라 칭해지는 어린이-청소년 당사자들 또한 이 사회의 일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라는 문구에는 지금의 (핵 있는)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존재가 없다. 사실 그들은 이미 핵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이 지켜주어야 할 여리고 가냘픈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무력할 뿐이다. 그들은 (핵 있는)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함께 투쟁할 동지로서 인정받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단어 하나에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한 단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언어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에는 당사자로서 투쟁하는 어린이-청소년들의 존재가 삭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에 투쟁의 주체인 어린이-청소년들은 비(非)가시화된다.

나는 밀양의 주민들을 짓밟는 국가폭력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밀양에 갔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미콘 앞에 뛰어들고 크레인 차량 아래 드러눕기도 하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실천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렇게 활동하는 것이 나의 신념을 지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기특한 아이’고 이쁜이’였지 ‘연대동지’가 될 수 없었다. ‘우리 아이들’의 프레임 안에서는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어린이-청소년인 나의 존재가 부정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기특한 아이, 이쁜이로 칭하고 그렇게 대하는 이들이 나를 부정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청소년을 거의 보지 못해서 신기하기도, 기특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좋은 뜻으로 나를 칭찬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서양의 속담처럼,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을 뿐이다. 나는 기특한 아이가 아닌 그들의 동지로써 존재하고 싶었다.
그들의 선의는 결과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4000장의 탄원서 - ‘활동가’가 될 수 없었던 ‘품 안의 아이’

어린이-청소년들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언어는 ‘함께’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구호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비(非)가시화된 어린이-청소년 주체는 ‘동지’가 아닌 ‘기특한 아이들’로 치환된다.

내가 현장에서 했던 활동들은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밀양의 주민들과 함께하며 느꼈던 안타까움과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였지만, 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긴 것은 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주체로서 드러나지 못하는 나의 판단과 실천은 ‘연대’가 아닌 ‘기특함’이 되어버렸다.

2014년 1월 7일, 나는 카고크레인 아래에 들어가 밀양송전탑 공사를 저지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곧이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영장실질심사를 앞둔 당시 밀양송전탑 반대대책위는 탄원서를 배포했다. 대책위의 탄원서 역시 그런 시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기 위한 ‘활동’으로 체포되었지만 그 탄원서 안에서조차 나는 현장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로 불릴 수 없었다. 내가 밀양에서 했던 활동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내가 어떤 이유와 맥락 속에서 크레인 아래 들어가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구속되지 않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나이 어린 19세 청소년이고 곧 대학 입학을 앞둔, 앞길이 창창한 청소년이기 때문이었다.

같이 체포되어 영장이 청구되었던 다른 활동가의 탄원서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는 나이로 평가받지 않았고, 영장 청구의 부당함 또한 그의 활동으로서 설명되었다.

“재판장님, ○○○ 님은 ○○○이라는 시민단체 상근활동가로서 우리 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고 공공성을 갖출 수 있도록 7년 동안 활동해 왔습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이 무엇인지 아는 시민단체 활동가로써 도주의 의사가 전혀 없으며 증거를 인멸할 사안도 아닙니다. 양심에 따른 행위를 부끄럽게 만들 이도 아닙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밀양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현행범 체포되어 경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열아홉살 조은별의 탄원을 위한 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조은별은 올해 3월, 성공회대학교에 입학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19세 청소년입니다.”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고 이야기하는 내 부모의 탄원서 또한 나를 철저하게 대상화시켰다.

“은별이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였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그 어린 것이 경찰들을 모욕하고 공무집행을 방해했으면 얼마나 했고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무시무시한 죄목을 달고 차가운 유치장에 갇혀 있지만 저희들에게는 아직도 품속의 아이에 불과합니다. 이제 대학에 합격했다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기숙사비라도 스스로 마련해 보겠다고 밤새 일을 했던 아이가 감옥에 갇히고 처벌을 받아야할 만큼 죄를 지었는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밀양의 눈물, 밀양의 아픔을 외면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얻어 혼자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고 그렇게 가르칠 용기가 없었던 저희들 부모의 잘못일 것입니다.”

위 탄원서에는 내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맥락과 그런 실천의 바탕이 된 나의 판단은 사라졌고, ‘불의를 외면하지 못하게 키운 부모의 잘못’만이 남았다. 또한 나는 투쟁의 주체인 ‘활동가’가 아니라 ‘그 어린 것, 품속의 아이’ 등으로만 호명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투쟁의 ‘주체’로서 가시화될 수 없었고, 구속영장의 부당함을 내 ‘활동’의 정당성으로 입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품속의 아이로, 불쌍한 아이로, 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대책위의 탄원서에도, 내 부모의 탄원서에서도 나는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존재했다. 구속영장의 부당함은 내 활동의 정당성으로 증명되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그 탄원서들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내 부모의 탄원서는 주요 일간지에 기사화되기까지 했고, 대책위에는 탄원서가 쉬지 않고 들어왔다. 영장실질심사 전까지 주어진 이틀 남짓한 시간동안 모아진 탄원서는 3천장이 넘었고, 내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녹색․탈핵운동 진영에서 ‘우리 아이들’의 프레임을 버리지 못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순결한 대상. 어른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자. 이러한 이야기는 감정적인 동조를 이끌어내기 적합하다. 거친 표현으로 ‘잘 팔린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알리고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이들로써는 이런 카드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손쉬운 방법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아이를 걱정하는 수많은 ‘엄마’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우리를 대상화시키지 말라, ‘동지’로 인정하라는 청소년활동가들의 주장은 ‘메타포(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족함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사실 어린이-청소년 주체들은 꿈나무, 미래 세대가 아니라 이미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다. 녹색․탈핵 운동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들을 계속해서 대상으로서 이용할 것인가, 동지로서 손잡고 나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 판단의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녹색운동의 가치라고 말했던 ‘함께’다.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인가, 녹색의 가치인 ‘함께’인가? 나는 녹색운동을 하는 이들이 청소년들을 보호대상으로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할 동지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청소년을 대상화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함께’의 시작이라 말하고 싶다.

또한 이 '함께‘는 녹색․탈핵 운동에만 한정된 가치는 아니다.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손잡고>, 해고자들과 함께하는 <와락 프로젝트>, 우리가 여기서 ’함께‘하고 있노라, 외치는 성소수자 운동들도 모두 ’함께‘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이야기하는 어린이-청소년의 주체성을 녹색․탈핵운동 진영만이 아닌 운동사회 전반에 이야기하고 싶다. 여러분이 이야기하는 ’함께‘의 실천을, 우리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임

누피 님은 청년초록네트워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