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일?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나는 진짜 몰라.
그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말 모르겠어.
사실 난 알고 있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렇지만 내 탓은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레이프 크리스티안손 글)는 학교 쉬는 시간에 있었던 학생간 폭력사건을 두고 관련된 학생들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는 그림책이다. 폭력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학생들의 증언으로 사건이 추측될 뿐. 폭력에 대해서 그리고 책임에 대해 묻는 그림책이 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도 모르는 어린이의 증언부터 시작할까? 무척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궁금증을 잠시 접어두고 우리는 왜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보자. 학교폭력에 대한 수많은 분석과, 신뢰할 수 없는 해결방안이지만 이런저런 대책이 반복되는 이유는, 폭력이 발생하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학생과 교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이어지는 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눈감지 않는 것은 공동체의 당연한 몫이다. (어떤 공동체인지 혹은 공동체인지 따지기를 일단 넘거간다면.) 폭력이 대물림된 사회에 대한 책임감의 발현이든, 앞으로 닥칠 폭력사회를 예방하는 것이든, 폭력에 대처하는 것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함께 사는 공동체에 대한 인정이고 역할임에 분명하다. 학교 역시 아직까지는 느슨하거나 애매한 어쨌든 그런 관계의 공동체이니까 예외는 아니다. 공동체의 확인은 폭력에 대처하는 '우리'의 출발점이나 다름 없다. 그래야 '모르는 일이야'로 끝내지 않고 다음을 얘기하기 위해 손을 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학교폭력의 근거가 되는 사회
아이들이 그 앨 때리기 시작했어.
모두 같이 때렸지.
나도 때리긴 했지만 조금밖에 안 때렸어.
......
다 그 애 탓이야.
그 앤 너무 한심해.
우리랑은 너무 달라.
...
그 앤 이상해.
...
그 앤 선생님한테 이를 용기도 없을 거야.
겁쟁이 같으니라고.
'그 애 탓이야, 달라, 이상해, 한심해, 짜증나..'처럼 피해자를 맞을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으로 몰아 버리는 폭력의 이유들은 사회통념과 함께 자라고 어느새 정당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맞을 만한 애, 구박받을 만한 언행, 따돌림 받을 만한 무엇 등등등. 이것은 학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폭력의 가해자들도 피해자가 맞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늘어 놓고, 말 안듣는 애들은 맞아야 한다라고 버젓이 훈계하는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맞을 만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폭력을 가한 학생도 똑같이 말한다. '그 애가 말을 안들어서 때린 것뿐'이라고. 폭력적인 문화가 만들어낸 무섭고도 슬픈 대답이다.
폭력에 대한 공동의 감각을 키우자
오늘은 더듬는 말투가 맞을 만한 이유가 되지만 내일은 검은테 안경이 맞을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또 오늘은 네가, 내일은 우리가 사건의 중심에 있을 수 있는 것이 학교폭력이다. 하지만 폭력에 대처하는 우리의 이유가 이런 두려움뿐 만일까? 이 그림책의 또 하나 미덕은 이런 두려움과 안전을 미끼로 책임을 낚시질 하고 있지 않은 점인데, '책임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책임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제는 불편하고 불필요하다는 느낌이다. 어쨌든 폭력의 두려움이 문제라면 폭력이 없는 곳으로 피신하는 것이 가장 쉬운 선택일텐데, 왜 우리는 폭력에 맞서는 것을 고민하게 되는가? 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일까?
두려움과 책임의 자리에 '변화의 기대'와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연대의 힘'을 대신 넣으면 어떨까? 맞아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 그리고 자신 역시 이런 처지에 놓일 수 있는 공동체에서는 폭력을 피하거나 당하지 않도록 처신하면 될 뿐, 굳이 폭력에 맞설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폭력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에서 폭력은 해결해야할 공동의 문제로 등장한다. 어쩌면 공동체의 확인보다 우리 사회가 반폭력에 대한 정의와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우선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폭력을 폭력으로 바라보는 공동의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차별과 반폭력에 대한 공동의 감각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상해', '달라', '짜증나'라는 일상적 말들이 어느날, 어느 교실에서는 '자식이 여자애 같이.. 이상해'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보통애들하고 달라..' '찌질하게 구니까 짜증나서 그렇지'처럼 폭력의 속살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다른 모습, 다른 태도,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못하는 문화와 사회가 만들어내는 폭력의 전조가 유유히 학교를 떠돌지만 지금껏 대책은 이런 흐름을 막지 못해왔다. 40여가지가 넘는 학교폭력 사건 조사경위서도, 학교폭력자치위원회도, 단편적인 학교폭력예방 교육도 해결의 실마리에 닿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림책 속 학생들이 말하는 '이상해, 달라, 짜증나'는 보통의 교실에서도 마치 취향이듯, 고정적인 가치인듯, 혹은 무감한 표현인듯 넘쳐난다. 이것이 내재된 권력 증표이고 정교하게 작동하는 폭력의 일면이란 걸 성찰할 시간도, 밑바닥에 자리한 혐오와 배제의 그림자를 알아차릴 기회도 없다. '그냥 싫은 것'이 담고 있는 권력과 구조의 이면을 따져볼 기회가 학교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학교가 이런류의 '생각하기'를 권장하고 있는지도 의문이 들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사건, 관계 그리고 폭력의 연결된 지점이 학교폭력을 해결하는 이정표일 수 있다. 그 이정표 중 하나는 분명 '차별을 반대하는 인권의 감수성'일 것이다.
폭력에 맞서는 비법
괴롭힘을 당하는 누군가를 보고 그냥 지나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모르는 척](우메다 슌사코, 우메다 요시코/ 글, 그림, 송영숙 옮김)은 학교폭력을 모르는 척 하는 '나'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돈짱이 또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
열심히... 정신을 팔고 있는 척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
말참견이라도 했다가는 이번엔 우리들이 당할테니까.
모르는 척 시치미떼고 있는 우리들'
'나'는 책상을 치고 일어나 "괴롭히지 마"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결국 모르는 척 한다. 친구가 괴롭힘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는, 두렵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사건 속에서 요동친다. 이야기속 '나'의 이런 마음과 태도는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고, 모르는 척 한 '우리들' 모두에게 남겨진 상처와 아픔이다. 폭력이 가/피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모두에게 그리고 말과 행동, 웃음과 눈물처럼 모든 것에도 영향을 미치는 폭력은마치 공기처럼 흘러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까. 폭력을 모르는 척한 행동 뒤에 가려진 분노와 슬픔, 마음 쓰임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돼 있는 그림책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있다. '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서 반성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공개적으로! 물론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지만 여튼 폭력을 모르는 척한 행동을 반성하고 어느 정도 마음의 짐을 덜어 낸다. 공개반성의 낯선 모습보다 그 반성으로 학교폭력을 해결해 버리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모르는 척한 행동의 대가로 개인의 용기와 반성이 제시되면서, 지금까지 정말 골치덩어리였던 심지어 모르는 척해야 했던 폭력이라는 문제가 순식간에 중심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모르는 척한 걸 반성하는 것으로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다.
조금 달리 문제를 해결해 보면 어떨까? 폭력 앞에서 내가 모르는 척 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힘을 무지무지 키우고 엄청난 용기를 내서 한방에? 폭력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 더 큰 폭력일 수는 없으니 이것은 해결이 아닌듯. 힘없는 사람들이 폭력에 맞서는 방법은 아마도 '함께' 싸우는 것이지 않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그곳이 집이든, 지하철이든, 공장이든 그들이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학생이든... 폭력을 막을 수 있는 힘, 하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그것은, 함께하는 연대의 힘이지 않을까. 혼자는 두렵지만 함께 저항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고 이런 경험과 문화는 더 큰 힘이 된다. 그리고 반폭력이 당연한 가치로, 일상의 문화로 자리 잡은 교실에선 더이상 열심히 모르는 척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덧붙임
고은채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