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청소년 노동인권에 관한 실태조사 결과를 가지고 토론하는 토론회에 토론자로 간 적이 있다. 청소년이었고 알바 경험도 있어서 건너 건너 소개받아 간 자리였다. 실태조사 결과물에는 몇 퍼센트의 청소년이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고, 휴게시간도 보장되지 않으며, 일 하다 다쳐도 산재처리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기타 등등, 슬프게도 ‘익숙하게’ 화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많은 청소년 일터의 실태에 대한 반쪽짜리 정보였다. 나는 내가 있던 일터에서의 갖은 상황들, 숫자로 나타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앞으로 청소년 노동인권에 대해 조사할 때 포함되었으면 하는 부분들 -왜 권리 구제를 위한 절차를 밟지 않는지, 왜 환경이 더욱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부모 동의서를 내지 않는 사업장을 고르는지 등- 에 대한 이야기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사실 실태조사 자체의 틀은 만족스럽지 못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청소년 노동에 관한 관심을 가진 것이기에 꽤 기대하고 간 자리였다. 하지만 내 발표 후 사회자의 코멘트를 듣고 뒷통수가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일 하신 경험 잘 들었어요. 되게 고용주들한테 맺힌 게 많았나 봐요.”
맥이 탁 풀렸다. 청소년 노동인권에 관해서, 숫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각각의 ‘이야기’가 있고, 그런 맥락들을 좀 더 면밀히 파고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표가, 한 순간에 불쌍한 한 알바생의 하소연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러게 왜 공부할 시간에 알바는 해가지고 그 꼴을 당해?” 따위의 ‘노답’ 인 반응보다야 백배 천배 나았지만, 이것이 시각의 차이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가끔 뉴스나 인터넷 기사로 청소년 노동인권에 대해 다뤄질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들과 결이 다르지 않았다.
“‘운 나쁘게’안 좋은 사업장에 들어가서, ‘불쌍하게도’ 제대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다니 안타깝다. 고용주의 ‘인성’이 잘못 됐네.” 이런 반응들은 청소년 노동의 열악함을 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 화를 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동정해야 할 문제로 왜곡한다. 혹 이것을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접근한다 해도,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저 불쌍한 이들을 구제한다는 식의 접근법을 취하게 된다.
[십대 밑바닥 노동]을 처음 펼쳤을 때,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들이 ‘○○이’ 로 호명되는 것에는 살짝 흠칫 했다. ‘호칭’은 시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살짝 우려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이 책의 시선은 다행이도 내가 우려했던 높이에서 청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청소년이었던 때의 ‘나’는 나를 둘러싼 많은 인권침해들에 대해 일터에서 제대로 화내지 못했다. 주변의 이들을 둘러 봐도, 고용주를 상대로 ‘속 시원하게’ 따지고 제 권리를 찾는 사례들은 많지 않다. 이 속에서, 청소년과 같이 ‘화를 내는’ 시선은 소중하다.
헬게이트를 열다
청소년의 노동인권 침해 경험들이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이 사례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의해서 충분히 의도된 상황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각 사례마다 어떤 구조적 문제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지, 법의 틈새라는 것이 어떻게 의도되는지 설명한다. 그렇게 어떤 이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와 연결된다. 어떤 청소년이 운 나쁘게 ‘똥 밟은’ 게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한 환경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청소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들은 죄다 똥 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돌려가지 않고 명확하게 청소년을 희생시켜서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이 누구인지를 호명한다.
단순히 어떤 이의 사례를 듣고, 최저임금 미지급, 임금 체불, 휴식시간 미준수 등의 인권침해 내역을 뽑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실태조사에서 많은 숫자들로 청소년의 노동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고 또 증명되었다. 온갖 정책과 센터 등이 생겨났지만 우리는 그 이후에도 우리의 삶에서, 실태조사의 숫자에서 기업과 고용주, 파견업체 등의 배설물 이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우리 눈에 익숙한 온갖 퍼센트들 틈바구니에서, ‘노동사례’라는 것은 자칫하면 굉장히 쉽게 박제 당한다. 누군가의 특수한 것으로, 일반화 할 수 없는 부차적인 것으로. 하지만 거기서 좀 더 들어가면, 왜 청소년이 노동인권을 침해당할 수밖에 없는지가 보이고, 그 구조를 보게 되면 청소년들은 정말 ‘평등하게’ 인권침해에 둘러싸여 있음이 보이는 것이다. 책의 부제목을 빌리자면 ‘수상한 노동세계’에 문을 여는 것이다.
벗어났다는 착각들
청소년을 둘러싼 인권상황이 변화하지 않는 것은 청소년이 지나가는 시기이며, 조금만 참으면 조금 더 나은 상황이 찾아올 것이라고 모두가 말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 같은 것에는 되도록 가까이 가지 말고, 만약 인권 침해를 경험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몇 년 뒤에 사람이 된 뒤에는 달라질 것이라고. 그렇게 입을 막은 존재들에게 궂은일을 떠넘기고, 인건비를 아끼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미성숙하고 무책임해서 이 애가 일을 망쳐 놨다, 나는 선의의 피해자다.” 라며 발뺌한다. 갑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거 참 남는 장사 아닌가?
세상에는 갑보다 을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같은 을들조차 청소년의 노동인권에 대해서 무관심해 지는 이유는 청소년이 임시적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지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의 삶을 하향평준화 한다. 청소년의 노동환경은 힘들지만 그건 하다 말아도 되는 노동이고, 나는 더러운 직장 가족들의 생계 때문에 계속 다닌다. 너희들은 더 고생해도 된다. 그런 식으로 더 고생하게 되는 사람들의 존재를 만드는 것이, 스스로의 삶의 질 또한 낮춘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존엄을 빼앗을 수 있는 사회는 다른 이유로 다른 이들의 존엄도 앗아갈 수 있다. 나는 청소년이었을 때도, 지금도 계속 부당한 일터와 만나게 되고, 여전히 제대로 화를 못 낸 채 있다. 앞으로 몇 번 더 그런 상황이 와도 그 상황을 해결해 낼 자신이 없다. “나이가 어리니까 조금 참고, 곧 지날 것이기에 참으라.”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는 그 조건과 환경들에서 벗어나기는 너무 힘들다.
노동 이외에도 삶의 많은 장면에서 우리들은 자신이 청소년이라는 나이와 몸을 거쳐 왔지만 그 약자성이 아직 내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음을 보게 된다. 더 이상 담배가 뚫리는 편의점을 찾아 헤매지는 않지만 어린 여자가 담배피우는 모습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들로부터 도망쳐야 하고, 위계와 폭력의 학교에서 탈출해도 너무나 같은 모습의 일터와 만난다.
‘말’들을 모으기
나는 여러 알바를 거치면서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조용히 죽어지내거나, 조용히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인권활동을 하는데도, ‘알바’하는 곳에서 만큼은 입이 안 떨어졌다. 어떤 방식으로 고용주에게 ‘잘 화낼 수 있을지’ 모르는 것 보다 내가 얼마나 화려한 언변과 설득력을 갖춘 말들을 쏟아낸다 해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더욱 컸다. “청소년도 똑같이 최저임금을 받아야 한다.” 는 말보다 “어린 애를 고용해 주는 게 어디냐“는 말이 더 힘이 세고, "청소년도 성인과 평등하며 존엄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내가 맞서야 할 이들에게는 외계어로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비청소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청소년을 밑바닥 인생으로 만드는 구조에 익숙해져 있고, 이것을 깨부수려는 말들에 익숙하지 않다. 더 많은 청소년들의 일터이야기가 모일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 할 수 있다면, 청소년 스스로 이런 말들을 모아낼 기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청소년 언저리 어디에 있는 나도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임
둠코 님은 '청소년활동기상청활기'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