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로 시작되는 이 시는 어린이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과격한 단어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시 아래에는 한 소녀가 심장을 물어뜯는 섬뜩한 삽화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이 아이의 시를 표현의 자유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과 폭력적이고 패륜적인 시를 아이들에게 보일 수 없다는 의견이 서로 부딪혔다. 하지만 어른들의 분노가 점점 더 커졌다. 시를 쓴 아이와 이를 옹호하는 부모에 대해 무수한 악플이 달렸고 여론은 험악해져 갔다. 결국 출판사는 많은 사람들의 항의와 지적을 수용한다며 시집을 전량 회수,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어른들은 한 아이의 시에 왜 그리도 분노했을까? 시에는 한 초등학생이 우리 사회를 살며 품게 된 문제의식이 담겨있었다. 치열하고 잔혹한 경쟁 속으로 떠미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 맥락을 무시했다. 아이의 문제의식을 오롯이 바라보지 않았다. 시에 쓰인 단어와 문구만이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른들은 시를 쓴 아이의 분노를 상상하지 못했다. ‘아이라면 그런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아이라면 그런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따위의 고정관념이 어른들의 머릿속을 가득 메워 아이의 분노를 공감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기준, ‘아이다움’에서 벗어난 아이를 본 것이 너무도 당혹스러워 호들갑을 떤 것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지원이와 병관이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는 2006년 「지하철을 타고서」 를 시작으로 모두 9권이 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현재까지 8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있다. 부모와 아이들 모두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동화다.
이 책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영 작가는 자신의 자녀들을 키우며 경험한 일상들을 통해 글을 썼다고 한다. 그동안 아이들의 생활을 담은 책은 많았지만,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처럼 직접적이고 꾸밈없이 표현한 책은 드물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만나는 첫 경험의 순간, 올바른 생활 습관을 기르기 위한 노력, 삶의 순간에서 품게 되는 작지만 큰 고민들, 소소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부모들과 아이들은 두 아이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을 떠올리며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삽화 또한 매력적인 요소다. 삽화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장소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야기를 더욱 친숙하고 편안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장난꾸러기 병관이와 듬직한 지원이의 모습도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야기 군데군데 나오는 익살스런 병관이의 표정은 아이들이 참 좋아한다. 그림 곳곳에 숨어있는 동물들을 찾아내는 것 또한 책을 보는 또 하나의 재미다.
너무도 착한 지원이와 병관이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중 한 글귀다. 우리가 수필을 읽는 이유는 다른 이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나의 삶을 되짚어보기 위함이다. 나와 닮은 혹은 내가 그저 스쳐지나간 삶의 순간을 다른 이는 어떻게 만났는지, 그 만남에 어떤 의미를 담아냈는지를 지켜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파격’을 맞이한다. 삶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수필은 익숙한 일상 속에 여유로운 숨을 불어넣고 그 안에 작지만 반짝이는 깨달음을 담아내게 한다.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는 수필을 닮은 동화다. 아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수필다운 여유와 파격을 담고 있지 않다. 지원이와 병관이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재미는 있지만, 그 공감을 통해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거나 삶을 낯설게 보는 경험을 하기 어렵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답답함을 만나게 된다. 이 답답함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 답답함은 ‘아이다움’을 바라는 어른의 시선이다. 삽화에는 많은 생각을 품게 하는 여유로움과 자유로움이 담겨있지만, 글에는 ‘이런 아이가 착한 아이에요.’ 하는 도덕 교과서 같은 교조적인 태도가 담겨있다.
지원이와 병관이는 착한 아이들이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너무도 착한 아이들이다. 흔히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모습이 이 아이들에게 오롯이 담겨 있다.
이야기에서 지원이와 병관이는 어른들의 충고나 꾸짖음을 통해 잘못을 깨닫는다. 또 어른들의 조언을 통해 가치관을 세우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운다. 부모는 아이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배움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움의 과정에서 지원이와 병관이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삶의 순간에 적극 부대끼고 그 과정에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모습이 부족하다.
병관이가 놀이터에서 5천원을 주웠다.(「거짓말」 중에서) 주운 돈으로 야광 요요를 사고 누나와 컵떡볶이를 사 먹었다.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하려 했지만 결국 엄마에게 들키고 만다. 병관이는 누나와 함께 꾸중을 듣고 벌을 선다. 처음에는 천 원을 주웠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이내 5천원을 주워 요요도 샀음을 솔직히 말한다.
“어쩌자고 주운 돈으로 맘대로 장난감을 사. 너 경찰 아저씨한테 가야겠다.”
“돈을 주었으면 먼저 큰 소리로 주인을 찾아봤어야지... 그리고 병관이는 벌로 다음번 생일 선물 없다.”
부모님이 병관이의 잘못을 꾸짖는다.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병관이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에는 병관이의 고민과 성찰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과정이나 이 경험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병관이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것은 부모다.
병관이는 덩치 큰 우진이가 짝꿍 한솔이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싸워도 돼요?」 중에서)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우진이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하던 병관이는 아빠에게 묻는다.
“우진이라고 덩치 큰 앤데요. 나하고 내 짝꿍을 꼬마라고 놀려요.”
“놀린다고 싸우면 어떡하니? 참을 줄도 알아야지.”
“걔가 먼저 때리려고 하면요?”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함부로 주먹을 쓰면 안 돼. 주먹은 정의로운 일에만 쓰는 거야”
아빠는 병관이에게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답한다. 그리고 주먹은 정의로운 일에만 써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병관이는 아빠의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빠와의 대화 이후에 병관이의 고민이 좀 더 담겼다면 좋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에 자신의 결심과 선택의 과정이 보여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병관이는 결국 우진이와 싸움을 한다. 싸움을 한 둘은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다시는 친구를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친구를 때리지 않겠습니다.” 라는 반성문을 쓰게 된다. 아이들의 갈등의 맥락을 살펴보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북돋아주지 못한 선생님의 태도가 아쉽다.
함께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지원이와 병관이. 이 아이들이 또래들의 고민과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찾기 위한 부대낌을 직접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모순으로 가득하다. 너무도 복잡해 머리가 아프다. 뒤엉켜 있는 정의와 불의를 판단해야 하고, 무수한 갈등과 만나 부대껴야 하며, 내가 품은 답이 과연 옳은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고 정의로우며 긍정적인 것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어느 한 면만을 보여주려 애쓴다. 또 어느 한 면은 보여주지 않으려 애를 쓴다. 이 과정에서 아이에게 ‘아이다움’을 강요하게 된다.
어른들이 ‘아이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는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고 나약하다는 믿음이다. 아이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음에 대한 의심이다. 이는 곧 어른들이 답을 정하고 그 정해진 답들을 아이가 고스란히 가슴에 품기만을 바라는 태도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아이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소파 방정환 선생은 한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말자. 삼십 년 사십 년 뒤진 옛사람이 삼십 사십 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지하고, 아이 스스로가 삶과 부대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덧붙임
김인호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