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무실에 가려면 8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울리는 휴대폰 알람을 대충 잡아 끄고 10분 정도나 더 자고 일어나 씻는다. 밥은 먹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 안 먹는다. 사무실에 가서 점심을 좀 일찍 먹자고 친구를 꼬셔 참치김밥과 만두가 맛있는 가게로 가면 되니까. 좀 늦은 것 같아 서둘러 뛰어나왔는데 전철역에 도착해 교통카드를 찍으려고 보니 이런! 집에 지갑을 놓고 왔다. “오늘 늦어요.”라는 메시지를 동료들에게 남긴 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간다. 중요한 물건을 가끔 집에 놓고 오는 것 말고는 나의 보통의 아침은 그렇다.
어떤 사람은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저녁 8시면 잠에 드니 생체리듬에 따라 자연스레 일어날 시간이기도 하지만, 7시에는 아침밥을 먹어야 하므로 반드시 아침 6시에 일어나야만 한다. 밥때를 놓치면 몇 시간이고 배 곪으며 다음 식사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밥도 없을뿐더러 밥 먹는 걸 지원해줄 인력도 때가 되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지므로 그의 기상시간은 매일 아침 6시다.
# 보통의 치유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지만 보통은 잠을 많이 자고 푹 쉬면 낫는다는 걸 알기에 아플 땐 당분간 무리하지 않기 위해 몸을 극도로 아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무리한 일정들을 소화해야 할 때는 병원에 가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는다. 의사가 진단을 내리는 동안 내가 꼭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졸린 약은 빼주세요.” 어느 병원을 가도 이유에 빠지지 않는 게 ‘스트레스, 피곤’이지만, 처방받는 약은 저마다 다르고 그 약의 효과와 복용방법에 대해 약사는 친절히 설명을 해주신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은 몸이 아팠다. 주변 사람에게 아프다고 이야기하자 약을 주었다. 무슨 약인지 물어보니, 감기약이라고 했다. 나의 증상은 감기가 아닌 것 같다고,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이야기했으나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서 언젠가부터 그에겐 아침, 저녁마다 먹을 약이 생겼다. 무슨 약인지 물으니 얼마 전에 아프다고 하지 않았느냐, 의사에게 약을 타왔으니 우선 먹으라고 했다. 그를 만나지도 않은 의사가 병명을 진단해 약을 처방해줬다니, 그 의사 참 신통방통하다.
# 보통의 외출
외출이라고 따로 칭할 것도 없이 매일 나간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드는 교통비용만 10만원이 훌쩍 넘는다. 그 와중에 교통비가 150원씩이나 더 올랐다니. 술자리를 하나 더 줄여야겠다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출의 방법이 복잡하다. 외출하려면 외출증을 적어야 하는데, 어디로 외출하면 좋을지조차 모르겠다. 사는 곳에서 5분 정도만 나가면 음식들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고 서울 시내까지 오가는 버스들이 꽤나 다니지만, 다니는 길은 항상 똑같다. 사는 곳 바로 옆, 공기 좋은 산책로가 유일하게 허락된 ‘다른 세상’이다. 그러나 몇 번을 나가 이젠 지겹도록 익숙한 그 산책길을 걸으려면 절대 혼자 나가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들과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나를 매일 깨우고, 재우고, 밥을 먹도록 지원해주는 사람이 그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큰일 난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곳에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했으니까.
# 일상을 나의 뜻대로
나와 사는 곳이 다를 뿐인데 누군가가 살아가는 ‘보통’의 삶은 우리가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맞는 걸까, 현재의 상황들을 의심하게 된다. 예전 학교 다닐 때 일 년에 한 번씩 떠났던 ‘수련회’가 떠올랐다. 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심지어 휴식시간까지 내가 손댈 틈도 없이 끔찍하도록 빽빽했던 그날들. 2박 3일만 지나면 끝난다는 유일한 희망을 안고 버텼던 그날들이었는데 누군가에겐 매일이 수련회인 것이다.
삶은 결정들의 연속이다. 수많은 상황들과 주어진 역할들 속에서 내가 나의 하루를 만드는 결정들로 어제가 끝났고, 내일이 시작된다. 탈시설의 권리성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보면 탈시설을 권리라고 부르는데 별다른 논리가 필요 없다. 탈시설은 내가 나의 내일을 기획하고 기대할 수 있는, 일상을 나의 뜻대로 충분히 누릴 권리 그 자체다.
덧붙임
조아라 님은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