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활동을 한 지 1년도 안 되는 왕초보가 지면에 교육활동 경험을 남기는 것은 다소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 그래서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 인권교육과의 만남을 나누고자 한다.
이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나야를 만나기 전 탈북・다문화청소년의 한국사회 정착을 돕는 일에 오랫동안 함께했다. 어딘가로부터 이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곳이 북한이든, 중국이든, 필리핀이든-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분야가 낯선 청소년들과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고, 보이스피싱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배우며, 어려움에 처할 경우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것과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면 경범죄로 3만 원의 벌금을 낸다는 사회적 약속을 공부했다. 또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관을 방문해 이주배경 청소년을 이해시키려는 간담회도 진행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자연스럽게 알고 익혔을 것도 이주배경 청소년들에게는 하나하나 새롭게 배워야 하는 과정이었다. 이 사회를 처음 경험하는 낯선 존재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알려주면 정착의 어려움이 감소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갖는 편견과 차별의 벽은 그들의 노력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소수자가 다수의 틈에서 얼마나 더 노력해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수가 이들을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며 남북문화이해교육, 다문화 이해교육을 교사, 학생,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한번은 어느 학교에서 남북문화 이해교육을 마치려는데 한 학생이 “그렇게 힘든데 그분들은 왜 한국으로 오나요? 한국 사람들도 살기 힘든데...”라는 말을 남겼다. 그들이 떠나온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새로운 이웃이 된 그들을 이해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것만 강조하며 교실을 나왔다. 되돌아보면 돌보아야 할 불쌍한 집단을 소개하며 부담만 남기고 온 격이었다. 그 후로도 비슷한 반응을 몇 번 더 받으며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연대의식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가 내 안의 숙제가 되었다. 이해교육이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좋은 교육프로그램이라 확신했지만, 남겨진 씨앗이 무엇이냐에 따라 상생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인권교육활동을 통해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인권교육활동가들을 만나며 ‘나는 교육활동을 통해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몇 차례 교육으로 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서로의 삶과 권리를 존중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개인의 경험에 사회문화적 학습이 덧씌워진 이해교육으로는 어떤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보니 이해하려는 머리가 아니라 존중하는 태도가 우선임을 깨달았다.
25년 전 장애언론사에서 몇 년 활동한 것이 전부인 내가 지금은 장애인권교육을 하고 있다. 교육활동을 결심한 후로 얼마 동안 장애인권교육 활동가들의 교육에 참관했다. 대부분의 교육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참관이 거듭되며 교육생들의 참여가 활기를 낳고 있음을 알았다. 교육활동가들은 강의가 아닌 참여자들과 함께 묻고 답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스스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고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옆 사람의 경험을 듣는 참여형 교육은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맘껏 하도록 멍석을 깔아놓고, 놓치는 것은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며, 권리의 주체는 자신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 문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인권의 상호의존성을 짚어주면 참여자들 스스로 변화를 결단하는 박수를 치며 마치는 것을 보았다. 인권교육에 있어 더욱 놀라운 점은 참여자를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당사자, 기관종사자, 학교 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사람 자체로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알게 했다. 특히 발달장애 당사자와 인권교육을 할 때 눈높이를 맞추며 자세를 낮추고 그 사람만의 표현을 이해하고 상호 소통하는 모습은 감격적이기도 했다.
서로의 감정과 권리의식이 공유된 만남
여름이 지나고 유치원생, 청소년, 성인에 이르기까지 발달장애 당사자와 인권교육으로 만나는 날이 늘고 있다. 앞선 장애인권교육활동가들을 흉내내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야의 인권교육은 1회성 대집단 교육을 지양하고, 최소 4회, 소그룹 교육을 원칙으로 하기에 서로의 감정과 권리의식이 공유되는 만남이 가능하다.
최근 Y기관의 유치반과 청소년반을 4회씩 교육했다. 유치반 2회차 교육 때는 가을볕이 너무 좋아 아이들과 함께 잔디밭에서 햇볕을 쬐며 노래도 부르고 누워서 하늘도 보았다. 보조신발을 신은 M군의 손을 잡고 한발 한발 밖으로 나왔을 때 M군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과 몸짓을 했다. 여섯 살 M군이 사는 방과 잔디밭은 불과 70M도 안 되는 거리였다. 갇혀있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직접 행동을 한 것이다. 3회차 교육에 갔을 때는 참여자들이 거실로 나와 반갑게 인사하며 안기기도 했다. 유치반과의 교육을 마치던 날 한 사람씩 안아주며 잘지내라는 인사를 했다. 늘 먼 곳만 바라보던 M군이 나의 목을 감고 놓지 않았다.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지적장애와 지체장애로 휠체어에 있던 Y양과는 교육 기간이 이어지면서 Y양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떠한 삶을 원하는지 응원할 수도 있었다. 교육 중에 Y양의 휠체어는 기계가 아니라 Y양의 몸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 것을 요청한 것이 고마웠다고 했다. 고개 끄덕임과 눈빛, 약간의 손짓으로 자신의 감정과 선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Y양에게서 내가 받은 감동은 매우 컸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데 언어는 30%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가 소통의 도구라고 학습된 나에게 언어적 소통이 어려운 발달장애인 인권교육은 늘 긴장하게 된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교육경험이 늘어갈수록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조금씩 알아채고 있는 것 같다.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존중하는 태도가 있다면 비언어로 교감하고 소통하며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지킬 인권의 힘을 갖게 됨을 배워가고 있다.
덧붙임
얼씨구 님은 나야 장애인권교육센터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