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벌써 2달이나 지나고 마음이 바빠졌다. 나다에서 5-6학년부터의 강좌를 준비해왔기에 책언니의 모든 준비는 참고할 수 있는 예시 없이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다(물론 나다가 해온 이야기들은 가지고 있지만). 비록 같은 이들을 만나가고 있지만, 책언니에게는 매년이 새로운 나이대와 만남의 시작인 셈이다. 이 나이대의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짐작하는 게 큰 숙제다. 작년에는 이랬던 이들이 올해는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을까? 이제 4학년이 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이야기까지 함께 할 수 있고, 어떤 이야기까지가 아직 힘들까? 이런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물론 1월 1일이 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게 아니지만, 몇 달씩 만나지 못한 방학이라 그렇다. 짐작이 잘 안 된다. 생각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키가 커있고, 훅 변해있었으니까 섣불리 판단이 안 선다. 11살의 인간들은 대체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5-6학년이 되면 할 이야기들과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들이 방향이야 같지만 내용이나 구성 자체가 꽤 다르다. 4학년이 된 이들을 만나기 전에 1-3학년 동안 해왔던 이야기와 5-6학년에 해볼 이야기들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필요할 지 고민을 해야 했다. 어떤 연결이 필요할까 3년간 했던 책언니의 커리들을 살피다 숨을 멈출 뻔 했다. 어우 창피해.
1학년은 나름 컨셉이 있었다. 책언니 맛보기 그리고 ‘다름’에 대한 것. 다른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어떤 것을 다르게 바라보기 정도의 컨셉이었다. 3학년은 ‘감정’과 ‘세상’이라는 주제로 흘러갔다. 하지만 2학년은 우리가 해놓고도 흐름을 잡을 수가 없었다. 1학기 때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주였다면, 2학기 때는 우리가 지내며 생겼던 문제들에 대한 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의 흐름이라는 걸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피를 토하며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게까지 막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른 책언니 엠건과 둘이 얼굴을 들지 못할 만큼 창피해했다. 우리가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보다 잘 알게 된 거 아닐까? 하는 초 긍정적 마인드로 우리를 합리화 해봤다. 다시 말하지만 책언니는 매년 처음 만나는 나이의 사람들과의 새로운 시작으로 고군분투 중인 것이다.
‘나보다 약한 사람 괴롭히지 말자’
창피함을 느낄 정도로 이것저것 중구난방이라고 했지만, 깔끔한 흐름이 없다 뿐이지 아무 이야기나 한 건 아니었다. 우리가 그동안 읽었던 책이 어느덧 70권이 넘어간다. 하는 이야기가 겹치거나 비슷한 주제인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이들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확실했으니 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 강조하기도 하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해보려고 했다.
책언니를 하며 매번 떠올리는 질문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다가가긴 했을까?’‘이 시간을 통해 다들 생각이나 태도의 변화가 생기긴 했을까?’ 이 질문들에는 우선 ‘아니오’라는 결론이 난다. 그동안 나눈 이야기들을 듣고는 있었는지도 가끔은 모르겠다. 어떤 때는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잘 다가간 건지는 또 자신이 없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니 자신이 없는 거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게 당연한 거니까. 일주일에 2시간씩 만나서 이야기한다고 사람이 확 변하기에는 그 나머지 시간이 너무 길다. 그리고 사람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하하).
이렇게 꼭 전하고 싶은, 생각해주길 바라는 이야기가 잘 다가갔는지 모르겠으니까 같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전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하게 된다. 다른 이야기를 다 기억 못해도 좋다. 책 내용이 기억 안 나도 상관없다. 대신 한 문장 정도는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 가장 기억해주길 바랐던 한 문장은 단순했다. ‘나보다 약한 사람 괴롭히지 말자’단순하지만, 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든 세상이니까 자꾸만 하게 됐다. 나보다 약한 사람 괴롭히면, 나보다 강한 사람이 괴롭히는 것도 괜찮은 게 되어버리니까. 나보다 약한 사람 괴롭히지 말자. 그리고 약한 사람끼리 손잡고 우리를 괴롭히는 강한 사람한테 맞서자. 못났다고 미워하지 말고, 약하다고 무시하지 말자.
내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고, 받아들이고 가장 편안해진 이야기라서 더 그랬다. 내 못나고 약한 점을 근거로 누군가들이 나를 미워하고, 나는 다시 나보다 못나고 약한 사람들을 미워했던 게 내 삶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됐었다. 나를 더 괴롭히고 몰아붙였을 뿐.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그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생각을 이루는 작은 조각이 될 수 있는 시간이길
내가 책언니를 하는 건, 활동이다. 우리가 맺는 관계, 취하는 태도, 나누는 이야기 모두 기존의 세계가 강요하는 것들 사이에 틈을 만들어내기 위한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조금 덜 힘들게 살 수 있으려면 무슨 이야기가 필요할까에 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무조건 받아들일 거라는 기대도 아니고, 그렇지 않는다고 강제할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 맺는 관계와 태도와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어떤 힘이 될 수 있길 바라는 것 정도다.
그동안 책언니를 설명할 일이 있으면 장기적인 프로젝트라고 강조했었다. 지금 이들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만나왔고, 최소한 만나온 만큼 정도는 더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사람들의 삶은 대체로 부모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데 운이 좋게도 이들도 우리와 만나고 싶어 하고, 우리도 만나고 싶고, 이들의 부모도 이 만남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지지를 보내준다.
장기적인 만남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갈 수 있다는 건 참 중요하다. 덕분에 어떻게든 당장 쏟아내고 몰아붙이려 조급할 필요가 없다. 당장의 변화와 이해에 그 때 그 때 초조해 할 필요 없이 더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이야기 하면 된다. 2시간에 뭔가 결판을 내야하는 게 아니라, 몇 년을 보며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보장된 이 시간은 여러모로 책언니의 큰 기반이 되어준다.
사람은 경험과 정보를 통해 생각과 판단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그 기준을 통해 다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어떤 시간을 얼마나 보내느냐가 결국에 사람을 변하게 하니까. 이게 꼭 그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가 어렸을 적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와 관계, 태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따져보니 아주 예전의 어떤 장면과 대화들이 떠오르더라. 그리고 새삼 그 때를 다시 해석할 수 있었다. ‘그 때 그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하고. 그래서 믿는다. 우리가 성의를 가지고 이 시간들을 함께 하다보면 분명 우리와 함께 했던 기억, 경험은 모두의 몸과 마음에 남게 된다. 그 남은 것들이 의식하지 않는 새 생각과 태도에 작더라도 어떤 영향을 줄 테고, 희미한 한 조각이라도 이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게 될 거라고. 그렇게 우리가 어떤 잔상 정도는 될 수 있게 애써보는 거다. 그냥 문득, ‘아 그 사람들이 하던 게, 하던 이야기가 이런 거였구나’하고 책언니를 떠올릴 수 있게. 우리와의 경험이 언젠가 어떤 순간에 써먹을 수 있는 기억이 되길 바라며.
덧붙임
쩡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