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자란다
작년 가을 무렵부터 느낀 건데 애들이 정말 많이 컸다. 물론 방학 한 번씩 거치고 다시 만날 때마다 이 작은 몸들은 조금씩 조금씩 그 길이를 쭉쭉 늘리고 있었다. 근데 열 살이 되고 보니 몸의 길이(?) 말고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다. 예전에는 애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사방팔방 뛰어다니면 용을 잡는 용사라도 된 것처럼 같이 괴성을 지르며 잡으러 다니는게 일상이었는데, 요즘엔 애들이랑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 늘었다. 가끔은 어른 친구들이랑 보통의 수다를 떨 때의 느낌도 든다. 말이 뭔가 무난하게 잘 통한다. 이 사실이 나는 가끔 참 얼떨떨하다.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고 삐지고 울고 뛰어다니고 물론 그런 것들은 여전하지만, 횟수도 강도도 훨씬 줄었다. 무리 속에서 같이 놀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나 마냥 아기처럼 굴면서 지낼 수만은 없기 때문에 변해야 할 몫을 해내가고 있는 것 같다.
작년 2학기 수업 때는 그림책 「사라, 버스를 타다」를 통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상황극으로 재연해보기도 하고, 「양들은 파업 중」 같은 책을 통해 파업 얘기를 살짝 해보기도 했다. 내용이 어려울까봐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는 진행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마무리 부분에 하고 싶었던 얘기를 몰아서 할 때가 많은데, 사진 자료 등으로 시선을 확 모으고 분위기를 잡아서 공을 내가 슥 던지면 재미있어 하면서(혹은 수업을 빨리 끝내기 위해 그런 척하면서) 착 하고 받아주는 느낌이 있었다. 비록 ‘닭들이 인간들에게 우리 종족을 그만 튀겨 먹으라고 재판을 걸어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육식, 환경파괴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시간이었다)’ 같은 병맛 주제이기는 하지만 토론도 해보았다. 헛소리와 억지와 드립이 난무할지언정 되긴 되더라. 애들이 슬슬 머리가 크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달라졌다고 느꼈던 점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 처음 만났을 때 반짝 관심을 가졌던 시기, 그 이후의 권태기(?)를 지나 요즈음 다시 우리한테 살짝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전보다 덜 틱틱대고 조금 살가워진 느낌. 애들이 청소년기에 가까워지면서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만큼 우리 같은 어른 친구의 가치(!)를 이제야 알아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책언니, 한 살 더
새해가 밝았고 한 살을 더 먹었다. 한 살 더 먹기 싫어서 일부러 떡국 안 먹고 전날 먹은 술을 몰아내기 위한 해장 순대국을 먹었다. 쓸모없는 발버둥이었다. 그런다고 나이를 안 먹을 리 없으니까! 책언니도 올해에 접어들면서 네 살이 되었다. 4년 차라니. 뭘 했다고.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흘러만 가는데 해놓은 건 없고, 내가 살아온 26년이나 책언니 4년 같은 숫자 앞에서 나오는 것은 허탈한 한숨뿐이다. 싫지는 않다. 3년을 공으로 날렸다고 느낄 만큼 한 게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맨땅에 헤딩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고, 날마다 멘탈 털리고, 잘 된 수업 한 번 망한 수업 한 번에 일일이 일희일비했던 기억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만큼 지난 책언니 3년은 나에게는 알알이 빼곡한, 곱씹을 게 많은 시간이었다.
다만 어려운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다. 아이들은 자란다. 민이도, 유림이도, 그 애들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자란다. 그 명확함이 조금은 부럽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성실하게 자기들 나름대로 속이 여물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책언니들도 자라고 있을까. 우리의 활동에 한 살씩 한 살씩 시간이 더해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해왔다고 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수업. 정해진 일정. 다음 날 내야 할 숙제를 어거지로 해가는 학생처럼 싫어도 할 때도 있었고, 익숙한 관성에 몸을 맡기고 영혼을 반 스푼 정도 빼놓은 상태에서 몸만 다녀올 때도 있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정체가 대체 뭘까 혼란스러울 때도 많았다. 그 혼란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파고들고, 고민해서 여기까지 온 거라면 떳떳할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른 해야 할 일들에 떠밀려 그냥 해내는 것에 더 급급했던 적이 많다. 이런저런 기억들을 떠올리면 내가 정말 잘 자라고 있는 게 맞나 싶어진다. 적당히 잘 자란 척, 어른 흉내나 내는 이상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이건 책언니 활동 4년 차의 고민이기도 하고, 26년 차 인간으로서의 고민이도 하다.
같이 성장하기
새로운 책언니 수업을 만들 때 가능하면 참가자들의 엄마들과 부모 간담회 자리를 꼭 갖는 편이다. 책언니 활동이 어떤 것들을 지향하는지 전하는 일은 꽤나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다른 일들처럼 왜 필요한지 한 눈에 드러나는 기획이 아니다. 심지어 책언니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관계의 지속성이다. 이 점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더욱이 부모들과의 만남이 필수적이다. 이런 간담회 때마다 나다에서 항상 하는 얘기가 있다. 우리는 책언니 활동을 책언니들과 아이들이 같이 자라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고. 얘네 수업 잘 못 한다. 애들을 카리스마 있게 확 사로잡고 이끄는 것도 잘 못 한다. 그래도 여기 모인 분들께서 이 이십대 활동가들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기회를 열어준다 생각하시고, 이 사람들의 미숙함까지 안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난 이 얘기가 참 좋았다. 나는 우리 엄마가 아기였던 나를 제 밥벌이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키워줬다는 걸 안다. 살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친구들이 지금의 나를 키웠다는 것도 안다. 인간은 혼자 자랄 수 없고, 그렇기에 나의 성장 또한 나만의 공이나 잘못일 수만은 없다. 잘 자랐든, 못 자랐든 그건 나와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넓게는 이 세상 자체까지 서로 어떤 영향들을 주고받으면서 여기까지 왔나에 대한 이야기일 테니까. 미숙한 것보다 나쁜 건 솔직하지 못한 거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동안 쌓아온 시간들에 부끄러운 것들이 많다고 해서 마음을 꼭꼭 닫고 말하지 않으려고 들 때 지금 선 자리에 발목이 잡힌다. 해서 신년을 맞이하여 이런 오글거리는 다짐을 해본다. 책언니 4년 차의 부끄러움, 내 인생 26년 차의 부끄러움, 여기 붙잡히지는 말아야지. 그래야 솔직하게 자라고 있는 애들 속도에 맞춰서 우리도 무럭무럭 함께 자랄 수 있을테니까.
덧붙임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