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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새 사무실을 소개합니다

이곳 영등포 꿀잠 건물로 이사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훌쩍 넘었습니다. 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희 사무실은 신길동에 있어요. 제가 사랑방 활동을 하면서 옮겨왔던 충정로 중림동, 홍대 와우산 사무실 모두 다가구 다세대 건물들이 많이 모여 있는 주거지였는데, 그보다 더 빽빽하게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요. 출근 첫 주에는 뭔가 신기한 기분이 들었어요. 아침시간 직장으로, 학교로 가기 위해 동네에서 큰길로 나오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저는 거꾸로 큰길에서 동네로 들어가다 보니 뭐랄까요, 남의 동네로 출근하는 것 같더라고요. 뭐 안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 말이에요. 직장이 있는 동네로 서로 집을 바꿔 지내는 프로그램 같은 게 있다면 어떨까 상상도 해보고 그러면서 걷다보니 이제 큰길에서 동네를 가로질러 사무실로 오는 길이 금방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주변에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곳곳에 몇 개나 있는 슈퍼, 밥하다 부족한 게 있음 앞치마 두른 채 바로 나가 필요한 재료를 살 수 있는 야채가게, 이른 새벽부터 고소한 콩 냄새를 풍기는 두부가게,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게 신기한 만물상, 오랜 터줏대감 느낌의 세탁소, 칭따오 병맥주를 주로 사러 가는 중국식품점, 간판 없는 맛좋은 족발가게... 낯선 길이 익숙해지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인 것 같아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는데 주변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되게 길게 느껴졌던 길이 점점 짧아지고, 몇 번 마주친 분들과는 인사도 나누게 되고... 언제 정 붙일 수 있나 걱정을 했었는데, 점점 이 동네가 친근해지고 있네요. 그래서 영등포 사랑방 새 사무실 자랑 좀 해볼게요. ㅋㅋ

우선 큰길로 나가면 널찍한 영등포공원이 있어요. 공원이 있어도 이용을 안하면 그만이겠지만, 주변에 공원이 있고 없고는 꽤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밥 먹고 산책 다녀올 수 있는 곳이 근처에 있으면 참 좋은 것 같아요. 물론 홍대 사무실 바로 뒷편 와우산에도 공원이 있었지만, 이사를 앞둔 며칠 전에야 제대로 그 공원을 걸었던 것 같아요. 아니 여기 이런 숨겨진 명소가 있었다니, 뒤늦게 안 사실이 무척이나 아쉬웠어요. 봄에는 꽃구경, 가을에는 단풍구경, 이래저래 산책도 할 겸 사람들은 그동안 몇 번 다녀왔던 것 같더라고요. (왜 저만 몰랐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답니다. -_-;;) 그런 아쉬움이 없도록 이번 영등포공원은 자주 들어봐야지 했지만, 아직은... 퇴근길에 후다닥 지나갈 뿐 제대로 돌아보지를 못하고 있네요. 그 사이 날도 너무 더워졌고요. 그래도 영등포공원에서 발견한 기쁨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여기가 OB맥주 공장터였대요.

 90년대에 이천으로 공장을 옮기면서 공원으로 바뀌게 된 건데 당시 맥주공장에서 맥아와 홉을 끓이는데 사용했던 대형솥이 남아있어요. 후다닥 지나다니면서 무슨 조형물이 있나보다 그랬었는데, 이런 사연을 알고나니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실 오신 분들에게 근대문화유산이 있는 공원이라며 자랑을 하곤 합니다. ㅋㅋ 아침에 환승을 하고 영등포공원 앞 정류장에서 내리는데, 여름이 되니 분수를 틀더라고요. 버스를 딱 내리자마자 경쾌하게 움직이는 물줄기들을 보면 뭔가 저를 맞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이 동네가 예뻐보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사이 사무실도 조금 더 예뻐졌어요. ㅎ 이사를 하고도 한동안은 정신이 좀 없었습니다. 공사 하자 요청할 게 계속 발견되기도 하고, 버려야 할 자재들이 쌓여있으면서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지요. 그리고 들과 사랑방을 애정하는 분이 작업반장이 되어 대문, 철문, 실내문, 외벽, 계단 곳곳을 페인트칠 해주셨거든요. 우리가 쓸 공간이니 우리도 같이 힘 보태고 싶어서 하루 날잡고 다같이 페인트칠을 하기도 하고, 시간날 때 저마다 거들기도 하면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점점 새집 티가 나더라고요. 누가 칠했냐에 따라 페인트칠이 매끄럽기도 하고, 울퉁불퉁하기도 한데 어떻든 간에 직접 칠해서 그런지 다 예뻐 보입니다. 대문을 비롯해 철문들은 작업반장의 센스로 파란색과 하얀색을 나눠 칠했어요. 주변 집들 대문이 죄다 갈색인데, 간판이 없어도 대문으로 이곳이겠다 알 수 있답니다. 청팀백팀이냐고 놀리는 이에게 이렇게 말해줬어요. 여기가 바로 산토리니라고. ㅋㅋ 제가 그런 기분으로 사무실을 드나들고 싶은가 봐요. 

그렇게 한 달 여의 시간이 지나고나니 사무실을 오가는 길도,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도 익숙해지고 있어요. 한숨 돌리면서 지난주에는 좋은 집주인인 꿀잠 분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준비했던 집들이도 했습니다. 아담하니 좋다며 남겨주신 덕담들 보면서 참 고마웠습니다. 그러고보니 올해를 시작하며 "새로운 활동가와 새로운 사무실에서 새로운 기운으로!" 활동해보자는 목표가 있었는데, 상반기 동안 이뤄진 게 많네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기운이 소진되버린 것만 빼면 말이에요. ㅋㅋ 올해의 목표를 다시금 환기하면서 하반기 힘차게 보내야겠어요. 영등포 지역을 지나실 일 있을 때는 사랑방을 기억해주시고 들러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