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국가인권위원회는 뼈아픈 각성과 환골탈태에 나서야 한다.
- 국가인권위원회의 비전선포식에 즈음하여
오늘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증진 행동계획’(2006-2008)이라는 이름으로 향후 3년간 인권위의 업무전략과 실천계획을 발표하는 비전선포식을 갖는다. 국가인권위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종착지를 향한 새로운 여정을 다짐하며 축포를 쏘아 올리는 이 때, 그 누구보다 이를 반겨야 할 우리 인권단체들은 씁쓸함을 넘어 위태로운 심경으로 국가인권위의 2차 출항을 지켜본다.
국가인권위가 제시한 항로는 휘황찬란하면서도 비장하기조차 하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인권 증진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겠다는 다짐, 문턱을 낮추고 믿음직한 권리구제기관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 수동적으로 개별 진정사건을 해결하는 데 안주하지 않고 인권이 침해되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인권옹호와 예방 활동을 적극 벌여나가겠다는 다짐 등 어느새 설립 5년째로 접어든 국가인권위가 충실한 인권감시․옹호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제들을 비교적 충실히 뽑아 놨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제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스스로 몸을 낮추고 인권단체를 비롯한 인권진영과의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는 데 우리는 주목한다.
하지만 그 시작을 알리는 돛은 인권단체들의 기대와 지지 속에 힘차게 올려지지 못했다. 지난해 9월 인권단체 활동가와 개인 전문가가 외부위원으로 대거 참여한 가운데 ‘발전기획단’이 처음 꾸려졌을 무렵만 하더라도 우리 인권단체들은 2기 국가인권위가 함선을 수리하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데 비판과 협력을 아끼지 않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민간초청 워크숍을 거쳐 국가인권위의 혁신과제를 함께 도출하자는 인권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데 이어 아예 국가인권위 설립 4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워크숍을 열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는, 그간 관료주의적 독선과 폐쇄의 늪에 빠져있던 국가인권위가 비로소 인권현장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의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개월 남짓 후, 인권위원들은 발전기획단의 존재 의의와 논의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워크숍마저 사무처 차원의 실무 워크숍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인권단체들의 비판 성명에 대해 일언반구 답변도 하지 않은 채, 발전기획단을 일방적으로 해소해 버렸다. 그리고 5인의 인권위원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라는 폐쇄적 단위에서 오늘 발표될 ‘인권증진 행동계획’이 최종 잉태됐다. 그러면서도 국가인권위는 비전선포식을 앞두고서야 인권단체들을 부랴부랴 환영인파로 나와 달라 초청하면서 마치 이 계획이 인권단체들의 전폭적인 협력과 지지 속에서 마련된 것인 양 치장하고자 했다. 필요할 때만 인권단체를 들러리세우는 태도야말로 가장 먼저 청산되어야 할 2기 국가인권위의 과제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나아가 최근 국가인권위가 보여 온 행보는 향후 국가인권위의 좌초를 부를 암초가 바깥이 아닌 안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우려케 한다. 불과 얼마 전, 군부대 내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심각한 인권침해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결심하고 휴가를 나온 A씨를 긴급 구제해 달라는 요구를 국가인권위는 차갑게 외면했다. 지난 12월 전용철․홍덕표 두 농민이 경찰력의 폭압에 생목숨을 잃었을 때 국가인권위는 경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면서도 최종 책임자인 경찰청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는 어이없는 결정을 내렸다. 공소시효배제입법에 대해서도 껍데기뿐인 법 논리 뒤에 숨어 애초 법안보다 더 후퇴된 의견을 내놨고, 아노아르 이주노조 위원장을 불법적으로 표적 연행한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부여한 바 있다. 번뜩이는 인권감수성으로 인권피해자들의 곁에서 권력기관과 맞장을 떠야 할 국가인권위가 오히려 권력기관의 사정을 살피는 데만 열심인 형국이다.
지금은 국가인권위가 비전선포식과 같은 이벤트를 열 때가 아니라, 뼈아픈 각성과 결단의 고백이 필요할 때다. 특히 국가인권위를 이끌고 있는 인권위원들은 인권이 짓밟히고 있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고 인권단체의 의견과 경험에 귀 기울여 자신들의 빈약한 인권의식과 감수성부터 쇄신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가인권위 전체 구성원이 인권 정신에 헌신할 수 있는, 진정한 환골탈태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오늘 발표되는 인권증진행동계획이 문서 속에서 걸어 나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칼날을 들이대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도마 위에 던져 비판을 경청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인권증진행동계획에는 ‘위원회 활동에 대한 외부 평가체계를 확립하겠다.’는 다짐도 포함돼 있다. 이 다짐의 가장 중요하고도 우선적인 대상은 바로 오늘 발표되는 인권증진행동계획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인권위 내부에 집행과 모니터를 담당할 책임단위를 마련하고 인권현장의 평가와 고언을 듣는 정기적 통로를 마련할 때만 오늘의 비전선포식이 겉만 번지르르한 이벤트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국가인권위는 앞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며 순항하느냐, 아니면 잘못된 항로를 고집하다 결국 좌초하느냐 하는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다. 국가인권위가 스스로 만든 암초에 걸려 좌초되지 않으려면 인권을 빼앗긴 이들의 신뢰와 지지를 엔진 삼아, 인권단체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나침반 삼아 나아가야 한다. 인권단체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오늘의 이 초라한 비전선포식을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인권위원들을 비롯해 국가인권위 전체 구성원이 진정한 자기 개혁에 나설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2006년 3월 13일
인권단체 연석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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