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엄마가 통 쓴 적 없던 메일을 보냈다. 녹색 어쩌고 하는 수기 공모전에 글을 내야 하는데 먼저 읽어달라는 것이었다. 첨부한 파일을 내려받아 읽으며 어색한 단어나 문장을 조금 고치고 답을 보냈다. 와, 엄마 글 잘 쓴다! 이런 메시지를 붙여 답장을 보내기는 했지만 켕기는 마음이 남았다. 내용 때문이었다.
엄마의 글은 전기 절약을 제안하고 있었다. 멀티탭 스위치를 끄는 간단한 행동으로 절약할 수 있는 전기가 얼마큼이며, 그게 비록 작아 보여도 작은 행동들이 모이면 큰 변화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인권운동을 합네 하는 딸내미는 또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습관이 발동해서, 그렇게 절약하는 전기만큼 낭비도 심한 에너지산업구조와, 근본적인 전환을 모색하지 않은 채 책임을 개개인에게 떠넘기는 훈육의 문제와, 뭐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져버린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답장에 담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그만둔 건, 어쨌든 전기를 아끼는 노력에 꼬투리를 잡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후로 절전형 멀티탭을 챙겨서 쓰게 됐다.
그러나 세상은
전기 절약은 더 이상 목표나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의 도덕이 된 듯하다. 저마다 보태는 생활 속의 작은 실천이 자동으로 생태주의라는 가치와 연결되는 듯한 착각도 생긴다. 세상은 조금씩 나아질 것만 같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 화석 연료들은 무분별하게 채취되고, 석유 때문에 전쟁이 나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전기 절약 정책은 어떤가. 전기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벌주듯 전류를 제한하면서, 산업용 전기요금은 낮은 수준으로 책정해 총을 만들든 차를 만들든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에너지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국가의 선택은 언제나 정당화된다. 핵발전이 필요하다면, 지어지는 거다. 핵발전소의 사고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들이 발생해도 경각심은 그때뿐이다.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은 병원에서 X-ray를 찍어도 되나, 시장에서 생선을 사먹어도 되나 하는 개개인의 불안으로 남을 뿐이다. 일본산 수산물 수입 금지에 대한 논란은 있어도 핵발전에 대한 논란은 사라져버린다. 오히려 핵발전 정책을 강행하는 국가는 국민을 지키는 자로 둔갑해있다. 그런 국가가 밀양의 주민들을 직접 위험에 몰아넣는 것을 우리는 다시 보게 되고야 말았다.
밀양 송전탑 공사가 다시 시작됐다. 한전은 그/녀들에게 “협력을 호소”한다는 기만적인 표현으로 공사 강행을 선언했다. 경남경찰청은 32개 중대 3천여 명의 경찰을 투입했다. 멀티탭 스위치를 끄는 것만으로도 전기가 얼마나 절약되는지 수치를 댔던 엄마의 모습이, 한국에 핵발전소가 몇 기이고 그 중 가동이 중단된 것이 몇 기인지를 다 외고 있는 밀양 주민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예순이면 젊은 축에 속한다는 주민들 말이다.
물러설 수 없는 사람들
인류가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연의 힘을 축내야 한다는 것, 자연으로부터 에너지를 어떤 방법으로 얻고 전달하느냐의 문제가 인류의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좌우한다는 것, 아마도 우리는 이런 안타까움 속에서 저마다 작은 에너지 절약 습관들을 만들어왔을 것이다. 부정의한 에너지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흐름으로 만나지 못하면 무력해질 수 있는 작은 실천들. 그러나 무력해질 여지조차 없이 삶 자체로, 온몸으로 그 에너지 구조에 맞부닥뜨리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밀양의 주민들.
밤과 감과 고추와 깻잎을 키우며 살다가 난데없이 주민들의 삶으로 불쑥 들어온 송전탑은 처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 가만있으려니 찜찜하고 나서려니 잘 모르겠는 것이었을 게다. 8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들은 에너지 정책의 전문가가 되었다. 책상머리가 아니라 송전탑 건설 현장을 오르내리면서 온몸으로 그/녀들이 알게 된 진실을 알렸다. 농사를 짓느라 구부정한 허리보다 고통스러운 게, 매일같이 돌봐야 할 밭의 작물들에 손길 줄 시간이 없는 것이었던 사람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이유는, 그/녀들이 지켜야 할 것은 그저 지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생 농사 지어온 대로 농사지을 수 있는 터전, 평생 관계 맺어 온 이웃들과 삶을 나눌 수 있는 거점, 자신의 한 몸을 통해 조상으로부터 자손에게로 물려지게 될 근원적 생명력을, 그래서 삶 자체이기도 한 것을, 이대로 빼앗길 수 없으니까. 주민들이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한테는 함부로 안 하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시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때, 그것은 넋두리가 아니라 세상의 진실을 알리는 인간의 기록이다.
밀양이, 정부와 한전의 일방적인 송전로 계획에 끌려들어갈 때, 주민들은 온몸으로 저항하며 외쳤다. 보상 필요 없으니 765kV 송전탑 건설 백지화하라고. 강력한 전자파가 암 발생 등 생명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데 꼭 초고압 송전선이어야 하느냐고, 울산 신고리 원전을 가동해서 수도권까지 전기를 수송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전기를 쓸 수 없는 거냐고, 묻지만 정부와 한전은 충분히 대답하지 않는다. ‘국책사업’이라는 명분으로 토지를 수용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경찰을 통해 주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물리력이 국가에 있기 때문이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거만함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만 허용되는 폭력이다. ‘보상’을 원하지 않는다는 주민들에게 최선의 보상을 하겠다는 엉뚱한 답변이, 사람 사는 어디라도 송전탑이 지어진다면 막겠다는 주민들에게 지역이기주의라는 험담이, 침묵 뒤에서 주민들의 외침을 왜곡하고 있다.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공사 강행 중단을 요구하며 텔레비전 토론을 한 번 하자는 이유도 그 침묵의 벽에 압사당할 것 같기 때문이 아닐까.
조바심이 나는 이유
궂은 날씨에도 주민들이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새벽부터 밧줄을 걸어놓고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묶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 고립된 주민들에게는 음식도 물도 차단되고 있다. 문자메시지로 한 시간 간격의 속보가 들어온다.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조바심이 나는 이유는, 국가의 막강한 권력 때문만은 아니다. 밀양의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평생 살던 곳에서 살던 대로 살고 싶다, 죽어도 이 땅에서 죽어 묻히겠다는 간절함에 도대체 포기할 구석이 있기나 한가.
그/녀들은 핵발전에 맞서는 투사도, 국가권력에 불복종하는 행동가도 아니지만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하지 않으므로 그 모두이기도 한 사람들이다. “이리 사는 할매라고 이리 무시하느냐”고 항의하면서도 “그러나 우린 부끄럼 없이 똑바로 산다”고 말할 수 있는 한없이 당당한 사람들. 그래서 격렬한 충돌이 소강상태가 되는 잠깐 동안 “전경들도 앉아있게 하라”고 지휘관에게 당부하는, 한없이 너그러운 땅의 사람들이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웃음으로 환대하며, 쌍용차 해고노동자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은 제 것인 양 흘렸던 사람들이다.
그/녀들의 저항은 단지 그/녀들의 땅과 삶만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우리’를 지키고 있다. 깜빡 잊고 스위치를 켜둔 채 집을 나와도 ‘아차’ 하면 그만인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 전장에서. 전장에 내몰린 그/녀들을 옥죄는 침묵의 벽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고 있다. 밀양 송전탑 공사를 중단하라고 함께 외치는 것은 그 책임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들이 지키는 ‘우리’가 될 권리이기도 하다. 삶은 이어지므로
인권으로 읽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