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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에이즈의 날을 삭제한 이유

수술 이후 건강을 회복하고 있던 35세 남성이 요양병원에 옮겨진지 14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수액 치료가 필요하다는 주치의의 의견이 무시되었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본원으로 보내달라는 환자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요양병원은 말했다. 보호자가 협조하지 않는 상황에서 응급차 이용을 할 수 없었다고. 생사를 쥐고 있는 병원의 최소한의 윤리는 에이즈 환자에게는 굳이 베풀지 않아도 될 옵션 사항이었다.

에이즈 환자는 왜 사망했는가? 환자의 요청을 깡그리 무시하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요양병원의 책임 방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더 많은 것들이 그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에이즈 환자를 유일하게 받아줬던 수동연세요양병원이 어떻게 그 유일함을 칼자루로 휘둘러왔는지 당사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이어졌다. 그동안 감춰져있던 에이즈 환자 장기요양사업의 실태를 드러내는 증언대회가 11월 5일 열렸다. 은폐된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도록 입막음을 하고 싶었던 병원 측은 그 자리에 난입해 녹음기를 꺼내들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며 협박했다고 한다.

“병원에선 늘 당신들이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어디냐고 이야기했어요.”

에이즈 환자가 요양하는 병원이었지만 정작 에이즈는 금기어였다. “병원은 돈을 위해 우리를 수용하지만 그것이 알려져 다른 돈을 놓칠까 봐 에이즈 환자들을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다." 암병동과 실버타운을 이용하는 다른 환자들이 떨어져나갈 것을 우려해 병원은 늘 간병인과 환자들을 입단속 했고, 환자들을 감시하라고 간병인들에게 지시했다. 벌레 보듯 했다는 그곳에서 에이즈 환자들은 요양이 아닌 오히려 더 깊은 고립과 배제, 차별에 내몰려야 했다. 국가지원금이 늘어나도 필요한 물품을 받기 위해서는 늘 눈치를 봐야 했다. 제공되는 식사의 질도 너무나 달랐다. 드레싱 등 의료행위로 이루어져야 할 일들뿐 아니라 병실 청소 등 무수히 많은 업무가 간병인들에게 맡겨졌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간병인들이 환자들에게 폭언이나 구타 같은 가혹행위를 하기도 했다.

모니터단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당사자들의 제보로 이미 병원의 문제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지만,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관리 감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도록 입막음 하려고 했다. ‘유일한’ 병원에 더는 갇힐 수 없다며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는 감염인 당사자들은 현재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에 대해 국가인권위 진정 접수를 한 상태이며, 에이즈 환자를 존중하는 요양병원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냥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을 앞두고 11월 30일 예정되었던 기념행사가 갑작스럽게 취소되었다.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의 후원으로 진행되어 온 이 기념행사를 취소하면서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은 “에이즈관련 단체들의 피켓시위 등으로 시민들의 안전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GETTING TO ZERO(감염 제로, 사망 제로, 편견 제로)라는 슬로건이 무색하게 이미 그동안 정부에서 주관해온 에이즈의 날 기념행사는 시혜성에 기반 한 생색내기용 자리에만 머무른 채 감염인들의 목소리와 참여는 철저히 배제해왔다. 그래서 2006년부터 기만적인 세계 에이즈의 날을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로 이야기하며 감염인들이 주체가 되어 에이즈 인권 현실을 알리고 바꾸려는 노력이 이어져왔다. 시민 안전 운운하며 2013년 세계 에이즈의 날을 삭제해버리면서 저들이 노린 것은 바로 감염인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도록 가로막는 것이었다. 감염인 당사자들이 모이고, 자신들의 경험을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으면서 단절되었던 서로가 연결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게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고립시키면서 유지하고 있는 부자유, 불평등의 현실이라는 민낯이 드러나는 것, 그러면서 공고히 하고 싶었던 편견과 차별의 구조에 균열이 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저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얼마 전 출범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선언문의 제목은 이러했다.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 누군가의 존엄과 자유를 볼모로 삼아 유지되는 야만적인 현실 구조, 그것을 바꿔내기 위해 먼저 용기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 미세하지만 끝없이 이어져왔던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때 저들이 함부로 삭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힘, 평등한 자유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힘이 생길 수 있다. 그 몫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