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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나의 인권이야기] 2003년 청년인권워크샵에 다녀와서

2003년 청년인권워크샵에 다녀와서

오고은영 인권교육실 자원활동가

나는 인권교육실 자원활동가이다. 그래서, 주최측도 되고, 참여자도 되는 애매한 입장에서 이번 워크샵에 함께 하게 되었다. 편히 앉아 지켜보기만 하면 되리란 예상이 깨져 당황했지만, 지나고 보니 나 같은 인권초보자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워크샵장소인 크리스챤 아카데미 하우스는 북한산의 등산로 입구였다. 잠시나마 혼탁한 도심에서 떠나 맑은 공기와 새소리가 있는 곳에 머무른다는 것에 가슴 설레었다. 식당을 예약하고, 산책로를 탐색하고 한숨 돌리고 나니 금방 시작 시간인 두시가 되었다. 늦게 오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그 동안 준비해 간 대자보 용지에 각자의 캐리커쳐를 그려 넣었다. 오이, 낭만고양이, 동전 등 개성만점 캐릭터와 실제 얼굴을 대조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첫 시간은 서먹함 깨뜨리기 시간, 설문지를 들고 인터뷰를 하니까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열심히 물어봐 주고 대답해 주는 상대방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름 외우기 게임도 재밌었다. 두 팀 사이를 천으로 가리고 있다가 순식간에 치우면 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먼저 맞추는 팀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천이 내려간 직후에 대면한 사람들이 다급해 하거나 고심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이 절로 터졌다.
모둠 별로 모여 앉아서 처음 한 일은 대자보 용지에 사람을 그린 후, 신체별로 인권침해사항을 적어 넣는 작업이다. 우리 모둠은 말풍선에 대화체의 말을 써넣어서 구체적인 차별사례가 많이 나왔다. 몸 전체에는 "넌 키가 너무 작아", 입에는 "너 밥 먹고 하는 일이 뭐니?" 등이었다. 반면 다른 모둠은 목에는 사형, 다리에는 장애인 이동권 등 주요 인권 사안이 총망라되었다.
다음은 '인권의 개념'시간. 인권침해 사례별 조각 글을 보고 인권의 개념을 모둠 구성원들이 합의하여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아프간 난민, 가정폭력, 군대폭력, 취업시의 차별 등의 사례가 주어졌다. 사례에서 인권의 개념을 찾아내라? 모두들 더듬더듬 입을 떼었다. 누군가는 "인권은 자기 의지대로 나아가는 것이다"이라고 했다가 폭력을 행하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수정하기도 했다. 또 누구는 "인권은 한쪽은 존댓말, 한쪽은 반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이라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야기 속에서 그만의 절실한 인권체험에 공감이 갔다. 모둠별 발표에 뒤이어 강의가 이어졌다. 인권에 대해 알아갈수록 인간의 존귀함에 대한 믿음이 강해진다. 강의를 들으면서 가슴속에서 불끈하는 무엇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인권을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이었을 거다.
저녁 시간에는 다른 모둠원들과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떤 고등학생과 진로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저는 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셔서요.." 같이 얘기를 듣던 분이 하는 말인즉슨 "아까 우리가 인권은 쟁취하는 거라고 했잖아. 네 스스로 진로를 결정할 권리를 쟁취해야지!"
다음, 인권의 역사 시간에는 영화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인권선언하기란 과제가 주어졌다. 모둠원들이 공통적으로 본 영화를 찾기는 어려웠지만, 어떤 영화든 주연이나 조연에 따라 인권선언할 것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인권이 추구하는 자유' 순서에서는 내가 낸 퀴즈를 내가 맞춰야했다. 덕분에 우리 모둠의 성적은 90점. 막연히 알고는 있었더라도 정확한 용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인권공부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약 11시쯤 되어 첫 날의 일정이 끝났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간식과 술이 도착하자 사람들의 눈이 빛나면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자정 넘어 두 시가 되어서야 내일을 위해 자리를 파했다.

다음 날, 인권이 추구하는 평등 시간에는 마을을 설계해 보았다. 특이한 점은 모든 모둠이 광장과 자연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또,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도 공통됐다.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마을은 비슷한 모습인데 왜 그런 곳에 살 수 없는 걸까?
인권이 추구하는 정의시간과 연대와 실천전략개발 시간에는 이때까지 해 왔던 것보다 훨씬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과연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가상 사회단체를 만들고, 현 인권상황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점과 구체적인 대응전략을 함께 고민하고 나니 조금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얘기하는 걸로 그쳐선 안 되는데.., 결국 해결되기 힘든 문제들뿐이지 않나'하는 예상되는 무력감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건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감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느꼈다. 함께 연대하자. 현장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얘기들이 나온 걸 보면 모두들 '앞으로…'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이번 워크샵에서는 인권에 대한 배움 못지 않게 그것을 함께 나누는 기쁨이 컸다. 이틀 간의 짧은 만남으로 거창한 성과를 얘기하긴 어렵지만, 인권지킴이를 바라는 사람들을 마주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워크샵을 마치는 다른 사람들의 눈빛에도 행복함이 배어났다. '찰칵' 그 눈빛들은 떠나기 전에 찍은 단체사진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