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가 끊길락 말락 아슬아슬한 시간.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술을 먹은 나는 정신이 알딸딸하다. 이런 상황이 몇 차례 있었지만 나는 대부분 집에 기어코 들어갔다. 나는 목적지인 집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곳으로 가는 방법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인생은 그렇지 않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내가 가야할 길이 표시되어있는 지도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서는 맨 정신으로도 헤맬 수밖에 없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어떤 인간도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피해갈 수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가 지닌 한계뿐 아니라 갖가지 집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집착은 자신을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고, 나를 끝없이 아상 속에 빠지게 만든다. 생의 부정적인 측면만 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것처럼 이런 생의 부정적인 측면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 와중에 자기의 길을 찾는다는 건 그만큼 어렵다.
인간이 가야할 길을 설명하는 논리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학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논했다만, 그런 논리적인 차원이 아닌 직관적으로 체험되는 차원도 있다. 언어보다는 먼저 몸으로 아는 깨달음을 주는 말과 행동들. 그걸 불교식으로 말하면 화두라고 하겠다. 뭔가 도사 같은 말이지만, 그리고 이런 표현이 나에게 큰 화두를 주었던 사람이 사용하던 표현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규정력이 강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가수 이상은이 쓴「예술가가 되는 법」이라는 부제의 책에서 그녀는 종교를 가지라고 제안했다. 예술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 글을 읽으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술적인 영감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이유도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의 이 말도 일종의 화두가 되었고 그 이후로 이따금씩 기도를 하곤 했다.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것들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이야기하다보니 ‘아상’이니, ‘화두’니 하는 불교용어를 사용하게 되어 내가 불교신자 같이 느껴진다. 절을 가본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나는 내가 불교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불교신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나를 일치시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교든 아니든 상관없다. 내 삶을 긍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신념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종교의 본질이라는 건 세상과 인간을 설명해 질서를 부여하는 것 아닐까. 세상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내 삶도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는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종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잘만하면 종교는 삶을 긍정하는 힘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연기(緣起) 때문에 인권운동사랑방에 왔다. 만약 나 혼자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방에 틀어박혀서 개인적인 쾌락만을 찾으려 했겠지. 거창한 것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사회운동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작지만, 마치 가톨릭 신자가 고해성사를 하듯이 나의 이런 믿음을 실천으로써 고백한다. 지금 내가 쓴 이 글도 나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