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파이
눈망울 초롱한 아이들과 만나고 싶었어
……
창밖에는 햇살이 언제나 교실에 가득한
살아가는 얘기 들려주는 시골학교에
나뭇잎 내 나는 계집아이들의
먹머루빛 사내아이들의 선생님
……
험한 물살 흔들리는 아이들의 징검다리 되고파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가 되고 싶어라
푸른 보리처럼 자라나는 아이들 위하여
거름되는 봄흙이고파
중학교 이후로 십 몇 년간 한 번도 내겐 다른 길이 있을 거라 생각해보지 않았다. 교사라는 말보다 ‘교육의 현장에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정확한 내 지향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도종환 님의 ‘어릴 때 내 꿈은’ 같은 시를 자주 읊곤 했다. 그런데 그 시의 중간 부분부터 나오듯 학교라는 현장은 학생인 내게도 참 부조리한 공간이었다. 잘못된 것에 쉽게 눈감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고등학교 때부터 참 많이 싸웠다.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말을 하는 교사와 수업 시간에 싸우다가 ‘당신은 학생의 피를 빨아먹는 빈대’라는 격한 표현까지 쓸 정도로... 선후배 복종 문화에 저항한다고 선도부와 힘겨루기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 저항하며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와 교육 연구 동아리 활동을 하고 선배들과 ‘열린 교실’이라는 대안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해 지역 공부방, 사범대,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몇 년간 운영해 보기도 하였다. 그런 걸 하면서도 한 번도 내가 교육의 현장이 아닌 곳에 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임용고시에서의 부주의로 거의 잡혔던 꿈을 놓치고, 사립학교 면접에서 학교 현장의 부조리를 겪게 되면서 참 많은 생각들이 들었었다. 그러던 차에 교과서를 만드는 일도 의미가 있다는 선배의 말에 출판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욕망하는 것은 현장이라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되었다. 해가 갈수록 내 욕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나는 1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내 꿈을 향해 움직이려 한다. 말 그대로 ‘청년 백수(녹색당은 35세까지만 청년이라 하지만 내 맘은 아직 청년이다. ㅎㅎ)’가 되었다.
백수로서의 내 삶이 희망으로 넘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불안한 미래를 안고 간다는 것은 이미 각오한 것이니까... 내가 가려는 대안 교육 현장에 언제 갈 수 있게 될지는 지급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부도수표와도 같으니...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인권 활동가, 그리고 올바른 교육을 고민하는 한 사람이라는 내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 내 일상을 그러한 활동들로 더 많이 채워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
불안한 청년 백수의 삶, 지갑은 점차 가벼워지나 마음은 한결 여유롭다. 그러니 3년간 멈추었던 연애 세포를 키울 꿈도 꾸지 않는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