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인권영화제의 문을 두드릴 당시 난 ‘인권’보다는 ‘영화제’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 둘을 저울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그 당시의 난 모든 ‘현실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것들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했다. 물론 그런 나의 도피가 일시적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인권영화제 자원 활동을 하면서 상황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 버렸다.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이 척박한 대학 안에서, 여성주의를 일구는 데 미약한 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내 딴에는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총여학생회 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멋모르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순진하게-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일부 학생운동 안의 정파싸움과 조직 이기주의로 생긴 상처를 어찌할 줄 몰라 나는 휴학과 함께 그 공간을 떠났고 공황상태 속에서 심한 무기력함의 나날을 보냈다. 상처를 받은 공간을 떠나긴 했지만, 좌절감에서 비롯된 냉소는 내 자신을 점점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런 무력함의 나날들을 흘려보낼 즈음 인권영화제가 열리는 5월이 찾아왔다. 인권영화제를 지지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자원활동이었지만 그 동기의 밑바닥에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내면을 다시 채우고 싶은 욕구도 깊게 깔려 있었다. 인권영화제와 사랑방 사람들과의 만남은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던 운동에 대한 나의 좁은 시각을 교정해 주는 계기이자 내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영화제에서 내가 맡았던 티셔츠 판매 실적(!)은 스스로의 기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영화제 기간 동안 느꼈던 활력은 이후 인권영화 정기 상영회인 ‘반딧불’ 활동의 자양분이 될 만큼 충만했다. 그리고 인권영화제에서 평소보다 더욱더 밀도 있게 접할 수 있었던 여성, 아동, 성적소수자, 신자유주의, 농민의 생존권, 비정규직 문제 등 다양한 주제의 영화들을 통해 나는 이제껏 상업영화에서 느꼈던 갈증을 푸는 동시에 인권영화제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 동안 인권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생각들은 ‘반딧불’을 준비하면서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특히 서울역 광장에서 노숙인분들과 함께 했던 주거권 관련 영화상영회는, 이러한 영화의 상영이 운동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했다. 또한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고 전용철 농민 사건을 영상물로 제작한 경험은,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뿌듯했고, 앞으로의 활동을 고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전히 삶의 이정표를 탐색하며 끊임없는 고민과 회의를 거듭하고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인권영화제와 자원활동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얼마나 실질적인 보탬이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온통 주변은 취업과 토익시험을 걱정하는 목소리들뿐이다. 그만큼 각박한 생활상을 반증하는 것이겠지만, 주위의 이런 목소리들은 때때로 나를 무겁게 내리 누른다. 온갖 ‘현실’적인 문제들에만 매달리지 않는 난 이런 현실을 애써 회피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문득 나도 모르게 조급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면 나는 사랑방에서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오히려 내가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또 사회를 풍부하게 바라보는 눈을 뜨게 해준 그 경험들을 말이다. 난 그 눈을 통해 조급해하기만 했다면 지나쳐버렸을 수도 있는, 또 다른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한번 눈을 뜬 이상 눈을 감고 살 수는 없음을 안다. 큰 도움이 되진 못하더라도, 느리고 더디게(나의 성격처럼;;) 영화제와 반딧불 그리고 사랑방에서의 시간들을 지속적으로 가꾸어 나가고 싶다. □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