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있었던 주거인권학교는 6월 첫 주 끝이 났다. 그리고 한 주 뒤, 모처럼 노는 토요일의 달콤함에 허우적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약간의 허전함과 거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약간의 허전함은 그 동안 주거인권학교에서 만난 아저씨들과 함께 쌓은 얄팍한 정에서 온 것이다. 비도 오는데 다들 어떻게 지내시는지...
거대한 후회는 물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내 게으름에 대한 것이다. 더 잘할 수 있었고 더 잘해야 했는데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다 보니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진행한 프로그램만 유독 부실한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고 우리 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이런 나의 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때마침 미류 씨가 ‘자원활동가 편지’를 부탁했고 난 ‘완곡한 거절’따윈 시도조차 못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자원활동을 시작했을 무렵을 더듬고 있다.
04년 10월 31일
열 일곱도 아니고 무려 스물 일곱의 나이에 가출을 했다.(물론 나는 ‘출가’라 주장하지만)그것도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야반도주를... 내 인생 모든 게 처음으로 그럴 듯 하고 또렷했지만 마음은 어느 때 보다 불안하고 힘들었다. 야반도주 일주일 후 그 무거운 마음으로 나는 사랑방에 앉아있었다.
사랑방을 알게 된 건 대학생 때 어디선가 접한 서준식 씨 기사를 통해서다. 몇 년 뒤, 진로 문제로 한참 고민하던 시절에 읽은 ‘서준식의 생각’이란 책을 디딤돌 삼아 진로 고민을 마무리 지을 무렵 사랑방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꼭 사랑방에서 일하겠다는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러 단체를 기웃 거렸었는데 나 같이 아는 것도 경험도 없는 이를 맞아주는 곳이 사랑방 밖에 없었다. 암튼 그렇게 나는 04년 11월, 사랑방 자원활동가가 되었다.
왠지 이번 단락에 ‘자원활동가가 된 후 나의 눈부신 활약상’이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것이라곤 죄다 거리가 먼 것뿐이다. 글 쓸 때 마다 날짜 못 맞춘 거(이 글도 마찬가지...), 야동에 빠져서 회의 빼먹은 거(아프다고 핑계를 댔는데 유라 씨가 많이 아프냐고 안부 문자까지 보냈었다), 하겠다고 질러놓고 잠수 탄 거(아직도 진영 씨와 눈을 못 마주친다) 등 등... 할 수 없이 ‘눈부신 활약상’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지금 내 이야기나 좀 해야겠다.
다시 지금
나는 고등학교 교무실에 있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추’는 탓에 여긴 학교이자 전쟁터다. 매일의 전투에서 난 매일 패배자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나의 간절함은 학교도 바꿔내지 못하고 난 간절함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지 간절하게 찾고 있다.
이 학교에는 강제로 머리를 잘리고 거수경례를 강요당하는 아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업계 학교다 보니 교육 운동의 현장을 넘어 빈민 운동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성적 90%가 소득 수준 90%와 진짜로 이렇게 맞아 떨어지는구나 신기하기까지 하다. 노숙인 아저씨들과 ‘주거인권학교’ 프로그램을 하면서 난 우리 학생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아이들 앞엔 노숙인 아저씨들과 비슷한 처지로 향하는 번듯한 고속도로가 나 있고 소득 수준 90%를 벗어나는 작은 길은 어디에 있는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많은 싸움들이 그 작은 길을 찾는 방향으로 과연 맞게 나아가고 있는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꼬리를 무는 의문들만 머리 속에 가득할 뿐. 이 의문들은 ‘주거인권학교’가 진행되는 내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고 가끔 내 자신감을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곤 했다.
처음 단체를 기웃거릴 때 책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1년이 넘는 사랑방에서의 시간을 통해 난 책에서는 찾지 못할 의문을 얻었고 이제 그 고민의 답을 구하려 애쓸 것이다. 물론 그 답은 책이 아닌 활동 속에 있을 것이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의 게으름이 발목을 잡지 않길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