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웬걸. 지난 8일부터 4일간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전세계 사회권 운동단체들의 연대를 위해 조직된 ‘사회권 네트워크(ESCR-Net)'의 출범회의는 기대 이상이었다. 4일간의 빡빡한 회의와 워크샵 일정 속에서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의제들은 머리 속을 정신없이 흔들어 놓았지만 나는 새로운 도전과제들 앞에서 왠지 모르게 들떴다.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들은 없었다. ‘민중운동과 인권운동은 어떻게 만날 것인가’, ‘다국적기업에 어떻게 인권보호의 책임을 물을 것인가’, ‘무역과 투자, 민영화, 외채 문제와 인권’, ‘여성, 이주노동자 문제’ 등 이번 출범회의에서 논의된 주제들은 이미 오랫동안 다루어져 온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왜 그리 새삼스럽게 느껴졌던지.
국제회의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전세계 각 국에서 온 삼백 오십 여명의 인권활동가들이 서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는 모습은,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가슴 찡한 것이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전세계 민중의 연대를 떠올리며 가슴이 벅차 오를 만큼 나는 아직 순진한(?) 풋내기 활동가인 것이다.
각 나라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온 활동가들이 폭로하는 그들의 실상은 우리로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활동가는 “너무 비싼 에이즈 치료제를 살 수 없어 우리는 죽어 간다”고 말했고, 볼리비아의 활동가는 사기업의 독점으로 폭등한 물 값 때문에 쌀을 살 것인가 물을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볼리비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비록 각자 처한 자국의 상황은 달라도 활동가들은 이 ‘다양한’ ‘비참한’ 상황들을 초래한 원인은 결국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국적기업의 횡포와 그들의 무한이윤추구만을 위한 무역과 투자 그리고 사유화와 개발이 전세계 민중의 ‘공공의 적’임을 나는 새삼스레 재확인했다.
무엇보다 이번 회의는 내게 ‘반성’의 기회였다. 새로울 것 없는 주제들이 내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그만큼 잊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활동을 시작한지 6개월도 채 안 돼 어느새 나는 내게 떨어진 ‘일’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사회권을 위협하는 온갖 현상과 변화, 정책들의 연관성을 따지려 하지 않고 분절된 현안에 대처하는 데만 근시안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내게 있어 이번 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잊고 있었던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되었다는 데 있다. 사회권 운동, 인권운동은 어떤 사회를 목표로 하는가. 그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서 인권운동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사실은 이 물음에 언제 답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풀어야할 숙제로 고스란히 남았지만 새로운 도전과제들은 언제나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법이다. 다시 달릴 준비를 하며 출발선에 선 두근거리는 기분을 느낀다.
지난 4일간 매일 아침 8시 반부터 6시까지 진행된 회의와 워크샵에서 나온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전세계 인권활동가들이 인권을 주제로 무역, 투자, 다국적 기업, 개발 등을 논의하는 네트워크를 출범시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삼백 오십여명의 전 세계 활동가들은 각자 싸움의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 중에는 아직 목숨을 내놓고 힘겹게 싸워야 하는 이도 있다. 그들에게 연대의 인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