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으로 크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을 받아 사회의 한 부속물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일반 학교 교육은 갈수록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사회-사람 뿐 아니라 자연 전체를 파괴하고 죽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도움을 준다.
초등학교부터 입시 교육의 시작이다. 마음껏 뛰놀고 마음껏 친구들을 사귈 나이에 학원을 서너 개씩 다니며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동바동 된다. 이런 제도 교육은 대학가서도 마찬가지다. 취직의 문이 너무 좁아 끝없는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무사히 일자리를 구해도 마음 편하게 살 수는 없다.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야 한다.
이런 자본의 굴레에 내 아이를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올해로 40살이다. 내가 40년 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고통을 그대로 아이에게 물려 줄 수는 없다. 조금 헐벗고 배고프게 살더라도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몸은 비록 조금 여윌지라도 마음은 편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찾아야 한다.
지금은 미국식 소비문화가 전 지구의 삶을 병들게 한다. 조금 더 편하게 살겠다는 마음이 지구의 목숨을 죽이고 있다.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가지려고 서로 죽인다. 사람이 살자고 동물을 죽이고 숲과 강, 바다를 파괴한다. 이제 무더운 날에 눈이 내리고 추운 날씨에 큰 비 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런 것이 다 잘못된 교육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의 교육 제도는 살림의 교육이 아닌 죽임의 교육이다. 내 목숨 살리기 위해 남의 목숨을 죽이는 교육이다. 벗어나야 한다.
이런 잘못된 자본의 굴레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 나 하나 살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모두 다 죽는다.
이제는 자연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만든 교육이 아니라 자연이 말하는 배움터를 세워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자동차나 손 전화기, 컴퓨터를 먹고 살 수는 없다. 땅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먹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땅을 일궈서 먹을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산업사회는 갈수록 땅을 일구는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내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좋다. 그냥 북한산 자락에서 사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과 부대끼며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며 산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다람쥐, 청설모, 토끼, 살쾡이, 노루, 참새, 산비둘기, 꾀꼬리, 부엉이, 굴뚝새, 참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씀박이, 진달래, 개나리, 아카시아, 수많은 풀벌레 등 여기서 다 쓸 수 없는 온갖 살아 있는 것들과 어울려 그들을 친구로 삼으며 그들의 목숨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에게 대안 교육을 시키려 한다. 그것은 내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살아오면서 쌓아 왔던 온갖 욕망의 찌꺼기를 한 꺼풀 벗는 길이다.
2004년 1월 14일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삼각산 재미난 학교’ 학부모 은종복 씀.
※ 은종복 씨는 서점 <풀무질> 대표이며, 인권운동사랑방을 후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