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책언니’로 불린다. 풀어서 책 읽어주는 언니, 8살 친구들과 동화를 매개로 이야기하는 인문학 수업이다. 같이 사는 친구가 예전부터 준비하던 일이었다. 나는 구경만 했었다. 애보기도 안 좋아하고, 동화책에도 흥미가 없다. 예쁜 그림책이 있어도 큼지막한 글씨만 훌렁 읽고 넘기곤 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세상은 요지경이다, 정말. ‘책언니’ 준비하는 동안 누가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여덟 살 인간을 만날 수 있겠느냐고. 술자리에서 잠시 스쳐간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여덟 살 인간‘이라는 표현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여덟 살 인간’ 이라니, 이런 말은 처음 듣는다. 사람의 테두리만 있고 속은 텅 비어 알 수 없는 무언가 같다. 속이 갑갑했다. 애들이랑 할 얘기 준비하는 동안 몇 번이나 이런 투정을 했었다. 나는 이미 너무 어른인 것 같다고. 만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하는 건 거짓말 같다. 이제 6살 되는 막내 동생을 보면서 그 애를 ‘인간’으로 생각한 적 있었을까. 울면 달래고, 심심해하면 만화 틀어주고, 엄마 없다고 징징 대면 과자 사주고... 그 정도. 가족 많은 집의 막내로 태어난 탓에 나날이 어리광이 심해지는 막내를 보면서 얘가 왜 이럴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얘를 어떻게 ‘착한 애’로 만들어야하나, 그 궁리나 했지. ‘애들은 다 그렇지’ 라는 말. 내가 고등학교 때 그토록 어른들한테 듣기 싫어했던 그 말. 내가 막내 동생을 보는 시선이 그랬다. 그 말은 태도였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속내는 같았다. 강자는 약자들의 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나는 민아(막내)와 제대로 얘기해보려고 한 적도, 그 애를 이해해보려고 해본 적도 없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린아이란 그렇게 해도 되는 존재였으니까. 스물 몇 살의 인간과 여덟 살의 인간은... 그래, 다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다름’이 소수성의 영역일 때, 가장 손쉽고 폭력적인 대처법, 그 중에서도 너무 흔한 예, 어린 아이를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이다. 혼내는 게 대화인 줄 알고, 가르치는 게 소통이라 착각한다. 뭘 모르는 건 애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건 ‘조용히 하라’ 고 입을 틀어막을 줄만 아는 어른들이다. 인권을 그래도 꽤,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아는 것만으로는 놓치는 게 너무 많다. 인권은 여전히 내 삶에서 중요한 단어이고 가치이지만, 해가 갈수록 권리보다 더 알아야하는 건 사람인 것 같다. 이젠 인권이란 말과 사람을 만나는 일이 퍽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만나야 배운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깨닫는다. 너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지, 혹은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올려다보고 있는지. 네 목소리가 들리는지, 어느 것도 들리지 않는지. ‘여덟 살 인간’ 이라는 말이 상기시켜주는 건, 내가 어른들의 세계로 옮겨오는 동안 깡그리 지워버린 어떤 세계다. 모든 게 합리적인 어른의 세계에서 ‘똥’, ‘오줌’ 같은 말이 제일 재밌는 여덟 살 인간의 세계는 꼭 별세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덟 살 인간도 TV를 보고, 학교에 다니고, 세상에 대한 불만을 가슴에 키우고 산다. 당신들의 세계에 닿는 일이 조금 오래 걸릴지언정,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부디, 당신들을 잘 만나고 싶다.
여덟 살 인간을 만난 적이 있나요?
엠건(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