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사랑방 자원 활동가를 고등학교 졸업과 거의 동시에 시작했다. '무엇을 배워도 대학이라는 곳이라면 다 좋아!' 하고 눈을 반짝이던 때부터 학교 수업이 시시하게 느껴질 때까지, 5년 정도 이곳을 드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두 번째 학교, 혹은 학교 이상의 학교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영화제 진행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는커녕, 내가 어느 부분에서 무얼 맡았는지 만 간신히 파악할 정도로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번 맘을 붙이면 '지금도 좋잖아? 이렇게 계속 해보면 되겠지'라고 느긋한 생각하는 성격이라(기민하게 내 자리와 주변을 돌아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거 이런 거 잘 못한다ㅠㅜ), 가늘고 길게 계속 회의 자리를 지키고 해가 바뀔 때마다 늘어다는 내 역할을 반겼다. 그렇다고 해서 요런 '뚝심'만으로 자원 활동을 이어온 것은 아니었겠지! 나는 사랑방 가는 날이 참 좋았다. 이미 '결이 고운 사람들, 각별하고 존경스런 사람들' 등 칭찬을 많이 받아온 사랑방 활동가들이지만 내 애정도 잊지 말아 줘요. 내게도 사랑방은 활동가로서의 삶을 늘 시시때때로 경험하고 거기서 나의 미래나 진로를 그려볼 수 있는 참 신나는, 살아 있는 곳이었다.
인권영화제의 한편, 또 찾아가는 인권영화제 정기상영회 '반딧불'에서의 뜨거움, 잠시는 인권하루소식 자원 활동 때의 종횡 무진했던 한겨울 등의 조각조각이 모여서 2008년 12회 인권영화제를 맞이했다. 매주 기획회의를 하며 거리 상영에 대비하고 뉴스레터 '울림'을 만드는 일은 가끔 새벽까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토막잠 자고 아침에 학교로 바로 가는 일과로 이어졌다. 중림동 골목을 내려올 때면 아침 해는 이미 하늘 높이 자리를 잡았고, 햇빛이 참 눈부셨다. '언제는 빛나는 햇살 아래 서 있던 것 같던 마토에게'. 영화제 자원 활동을 했던 문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불러준 말이다. 정말 이랬던 마토였는데!!
법학전문대학원 개강과 입학을 앞둔 3월 1일, 종일 기분이 이상하더라니 저녁에 사랑방 나와서 작품 시사를 하다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인권활동가대회를 다녀온 후라 더욱 '잠시 쉼'이 아쉬웠는지, 단순한 일상에 매몰돼서 공부에만 집중하는 삶에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불안했는지, 13회 인권영화제의 풍성한 개최를 위해서 충실히 준비를 다져놓아야 할 2월이 너무 빨리 해놓은 것 없이 지나간 것 같아서였는지,,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난 어느새 사랑방에 익숙해졌다. 이곳에서의 평등한 관계 맺기를 바탕으로, 마토를 '어린 여자애'로 보는 시선과 말투를 빠르게 감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국은 2월 말에 대학원 오티를 가서 한 학생과 싸움을 하고 말았다. 래군보다 조금 젊은, 그렇지만 입학생 중 최고령쯤일 남자에게 편하게 베개를 던지는 것을 보고(그렇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바로 말을 놓지는 않는다,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을 사람도 생각해보고,,오빠오빠 하며 바로 존댓말을 쓸 수는 없다는 내 생각을 말하고 동의를 받아 기쁘던 참이었다) 중간 정도의 남자애가 나에게 버럭 화를 냈다. 큰형님한데 위아래가 없다나 뭐라나……. 이런 경험 때문에 학교 가기 싫은 투정(?)에 눈물이 그렇게 났는지도 ㅋㅋㅋ
2004년, 첫 인권영화제 자원 활동가를 경험하고 나서도 사람사랑에 자원 활동가의 편지를 쓴 일이 있었다. 그때 쓴 글을, 지금은 도무지 부끄러워서 다시 찾아볼 수가 없다. 궁금하신 분들, 한번 보시고 ' 때 마토는 이랬어!~'하고 한번 회상하고 계세요. 금방 공부 마치고 찾아올게요.~ 안녕.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