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난 건 지난주에 있었던 집회 때였다. SH 공사 앞에서 있었던 그날 집회는 비닐하우스촌 철거로 인해 자신의 공간을 빼앗긴 공부방 친구들과 학부모들이 모여 이전에 따른 대책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6월 철거가 임박한 상황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아이들의 수에 비해 공간이 협소하고, 안정적인 공간이 아니어서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30여명이 SH공사 앞에서 둘러앉아 시작된 집회에서 그녀는 마지막 발언자였다. 그것도 사전에 섭외되었던 발언자가 아니라 집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사회자가 의례 “더 이야기하실 분 나와서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녀는 맨 앞에서 번쩍 손을 들었고,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소 당황하는 듯 보였다. 주위에 반응을 보니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그 정도로 ‘용감한’ 사람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 사람들 앞에 나선 그녀의 행동이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그녀는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였지만 한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울먹거렸고, 그녀의 눈물이 그치지 않아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많이 속상한 것 같다며 같이 눈물을 흘리거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었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나 또한 어느새 울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등장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단지 어린 친구(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에 대한 나이든 사람의 어떤 감상적인 마음 같은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순간적으로 그녀가 미처 하지 못한 말들에 대한 나의 상상이 개입되고 그녀의 ‘속상함’이 나의 ‘속상함’으로 이어져 미처 말로 풀어내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가 내 마음으로 들어와 버렸다고나 할까? 발화되지 못한 그녀의 말들의 여운이 오히려 내 마음에 전달되어 정리된 발언보다 더 파장이 있었다고나 할까? 그때의 나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는다면 ‘공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과잉 의미화 된 말들과 글들에 지쳐 있는 요즘 그녀의 솔직한 모습 그 자체가 나에게 위로를 준 것 같다.
며칠 뒤에 나는 그녀에게 집회 날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잠시 쑥스러워 하더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비닐하우스촌에 있었던 공부방에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계속 지내고 싶었고, 지금 이사한 공간이 좁기도 하고 주인이 언제 나가라고 할지도 몰라서 속상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마치 새장에 갇힌 새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녀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건가 하는 생각에 또 속상해졌다. 용산 철거민들을 인터뷰 할 때도 그랬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도 ‘그저 살던 대로 살게 해 달라’것 뿐이었다. 나는 도대체 이 요구가 어디가 어떻게 무리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SH공사와 이명박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할 만큼 했다는 식으로 뻔뻔하게 나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 그녀와 나의 공감의 순간을 생각하다 보니 이야기가 여기까지 와 버렸다. 요즘 내가 속상하고 답답해하는 일들에 대해 직업인으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의 말과 글을 만날 때마다 나는 불편하거나 지루해진다. 그 비판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 쓰고 있는 내용과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건지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나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것이 조심스럽고, 그들의 삶을 제대로 보지 않고 내 안에 그들의 삶을 설정해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인식의 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해석하면서 나의 이야기로 끌어오게 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새 사람들과 공감하고 그들의 삶을 온전히 보고자 하는 감정과 사고의 노력을 게을리 했을 때, 그들에 대해 아는 척하며 그들의 이야기로 먹고 사는 사람이 될까봐 두렵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심지어 나 자신에게 관대하기조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누군가의 삶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속상하다고 느낄 때, ‘아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속상해 하는 일들에 대해 같이 속상해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날 때, 안심이 된다. 심지어 나는 이러저러한 세상사에 대해 속상한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하고 희망한다.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