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770m. '강진리' 라는 이름의 봉우리 정상. 예까지 오르는 5일 동안 내 날숨과 들숨은 몇 번이나 교차되며 들썩거렸을까. 아래에서 아득하게만 보였던 7000m 설산들의 파노라마가 바로 눈앞에서 병풍처럼 펼쳐져있어. 날카로운 능선을 따라 비스듬히 미끄러지는 눈결도 하나하나 짚어보고 뽀족히 솟은 봉우리 주변으로 연기처럼 일어나 날리는 눈안개도 넋을 놓고 바라본다. 저 아래로 보이는 수백미터 높이의 장대한 얼음폭포와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우기 때 만들어진다는 수십미터 폭의 계곡줄기, 고개를 쳐들지 않아도 가깝게 보이는 새파란 하늘과 구름. 나는 지금 지구의 끝자락 어딘가에 서있는 듯한 기분이야. 그러면서도 작은 풀 하나 보이지 않는, 보이는 것이라곤 거대한 바위 절벽과 눈뿐인 신성해보이지만 황량한 풍경을 마주하고 있자니 이 풍경을 동행자 하나 없이 혼자 맞이하는 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장에 홀로 누워 촛불을 바라보다 와락 밀려드는 심란한 쓸쓸함과 애잔함에 눈물이 핑.
혼자 하는 여행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특히나 그 여행이 조용히 산을 오르는 거라면, 아마 자신의 감각과 감정에 스스로의 의식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규칙적으로 내뱉고 들이마시는 내 거친 호흡소리를, 내 발가락부터 뒤꿈치가 흙바닥에 닿는 촉감을, 뜨겁게 달아오른 내 심장의 온도를, 그리고 구름처럼 고요히 흘러가다 불쑥하고 내 온몸을 채워버리는 갖가지 감정들을 내가 의식하고 감지할 수 있다는 거 말야. 주변의 말과 행동들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건과 현상들 때문에 흔들리고 어지러웠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다보니, 그렇게 오롯이 그리고 정직하게 나를 나에게 맞추는 시간은 힘들기도 하지만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시간인지. 나눠 줄 수만 있다면 그대들에게 이런 휴식을 가장 먼저 주고 싶다우.
2.
다시 구불구불 산길. 히말라야 설봉의 풍광을 뒤로하고 4380m에 있다는 호수, 코사인쿤더를 향해. 하늘에 닿을 듯 고여있는 호수. 시간은 봄을 훌쩍 뛰어넘었건만 이곳은 침낭 위에 이불을 덮고 있어도 냉기로 몸이 떨리는 날씨다. 그래서 나에겐 밤별들이 쏟아진다면 가장 먼저 얼어버릴 것 같은 호수같아. 이런 호수가 네팔 사람들에겐 여러 신화들의 배경이 되었던 더없이 성스러운 호수라고 하는군.
네팔 사람들. 산을 오르다보면 자신의 체구만한 짐지게를 끈하나로 이마에 걸어 등에 짊어지고 오르는 깡마른 히말라야 사람들을 자주 보게 돼. 히말라야의 사람들에겐 두 다리가 유일한 운송수단이거든. 농사로 얻은 수확물을 지고 도시로 내려가 수일동안 팔아 산 음식들과 생필품들을 또다시 짐지게에 실어 산을 오르는 거지. 또 내가 짊어지고 갔던 크기의 대형배낭 두어 개를 포개어 등에 이고 올라가는 포터들도 볼 수 있어. 이방인들이 고용한 짐꾼인 거지. 등에 인 짐들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삶의 고단함이 검게 그을린 무표정한 얼굴에 묻어난다. 삶을 온몸으로 껴안고 우직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그럴듯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현지인들의 삶이 관광객들의 주머니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나의 여행 자체까지도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내 찾을 수 없는 답 때문에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밀어내버리고 만다. 다만, 가난은 결코 아름답진 않지만 그것은 세상의 한계를 일깨운다는 점에서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맴돌 뿐이다.
3. 하얀 설산의 풍경 하나만으로도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던 히말라야는 장엄한 설산의 위용에 더해 동화같은 산속 풍경들도 보여준다네. 청자색의 힘찬 계곡 줄기며, 이끼가 잔뜩 끼어 공기마저 초록빛이었던 울창울창한 정글, 그곳에서 빼꼼히 모습을 보이곤 이내 숨어버린 사슴 몇 마리, 그리고 멀리 눈덮힌 봉우리들을 배경으로 피어난 올망졸망 산벚꽃과 유채꽃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돌과 나무로 손수 집을 짓고 자신이 티벳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이방인에게 티벳의 독립을 기원해달라고 이야기하는 티베탄들의 자긍심과 용기였다네. 개발로부터 도시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들의 생활은 전기가 없어도 차가 없어도 전혀 궁색해보이지 않았어. 오히려 정말 궁색하게 느껴졌던 건 그 군더더기 없는 모습과 바램에 비춰진 우리네 삶이 기대하는 물질적이고 뻔한 행복, 그것.
4. 이제 곧 떠나온 서울로 돌아가면 새로운 직장일을 시작할테구, 지금까지 해왔던 활동을 한동안 계속 이어가진 못할 것 같아. 막막하고 암담하기만 한 현실의 한 복판에서 언제 다시 그대들과 함께 따뜻하고 용기어린 다독임과 충고들을, 그 깊고 치열했던 고민들을 부딪히는 술잔 속에 나눌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어 한없이 내 마음은 무거워진다. 더욱이 그간의 활동을 돌아보며 어느 것 하나 그럴 듯하게 결과로 만들어 낸 것이 없어 부끄럽고 또 미안하고, 그러네. 아마도 누구누구가 연행되었다는 게시판 글을 발견하거나 무심코 돌린 뉴스채널에서 전경무리에게 뭇매질을 당하는 누군가를 본다면 또 심란해하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테지.
그렇지만 앞으로의 시간이 또다른 내 생의 도전과 실험이라 생각하기에 그 무겁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고스란히 껴안고 시작하려해.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고마운 그대들을 다시 만나 내 지금의 무거운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 약속해.
검게 그을린 얼굴로 서울 돌아가는 날, 반가운 마음으로 찌아 한잔 나눠먹자.
2009년 봄, 히말라야에서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