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계획했던 건 아닙니다. 세계인권도시포럼의 토론 세션을 주관하는 일도, 인권활동가들의 토론회 참여와 교류를 독려하는 일도. 지난 5월, 광주 세계인권도시포럼 기획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인권활동가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인권의 제도화를 주제로 한 토론 세션을 인권운동더하기가 주관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어요. 더하기 운영회의가 활동해온 영역이 아니기에 선뜻 함께하기 망설여졌지만, 관련한 고민을 해왔을 법한 소속단체들에 연락해 의사를 확인한 끝에 <인권의 제도화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 지역운동에 무엇을 남겼나?>라는 제목으로 인권활동가 네트워킹 세션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인권의 제도화가 지역운동에 미친 영향을 살피고,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져온 싸움을 공유하는 토론회는 이렇듯 예상치 못한 제안에 생각지 못한 화답이 겹치며 만들어졌습니다.
인권의 제도화와 지역운동
각 지역의 인권 제도가 혐오 세력과의 싸움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올해만 해도 부천, 경기, 경남, 울산 등 여러 지역에서 조례를 둘러싼 대치가 있었습니다. 2018 충남인권조례 지키기 공동행동처럼 지역을 넘어 전국의 인권운동이 함께 맞선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해당 지역만의 문제이기 십상입니다. 싸움은 각자의 몫으로만 남고, 그 경험은 서로 공유되지 않습니다. 운동의 목적이 제도 그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제도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인간의 존엄이 더욱 잘 보장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인권운동은 이름에만 인권을 달고 있는 반인권 제도들에 대해 비판해온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최근 혐오 세력과의 싸움에서 인권 조례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어렵고 난감한 마음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러한 고민을 나누기 위해서는 일단 각 지역의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션 주제를 ‘인권의 제도화’가 아니라 ‘인권의 제도화가 지역운동에 미친 영향’으로 잡은 이유입니다. 가능한 많은 지역의 활동가들과 만나 토론하고 싶었으나, 포럼이 광주에서 열리기에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참여자들의 교통비와 식사비, 숙박비를 지원할 방안을 찾다가 인권재단 사람의 특별기금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토론회 개최 비용도 아닌 참석 비용을 지원하는 일이 흔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인권활동가들의 토론회 참여를 지원해준 인권재단 사람에 감사를 전합니다.
혐오와 차별은 ‘여론’이 아니다
발제자인 서창호 님(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 박영철 님(울산인권운동연대), 이진숙 님(충남인권교육활동가모임 부뜰)은 각각 대구, 울산, 충남 지역에서 경험했던 인권의 제도화와 고민을 공유해주셨습니다. 인권운동은 때로 인권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 때로 인권 제도 폐지를 막기 위해서 움직여 왔습니다. 그 과정에 혐오 세력이 등장하는 일은 모든 지역의 공통된 경험이었습니다. 혐오 세력은 ‘인권’, ‘젠더’, ‘다양성’ 등이 포함된 조례안에 반대하며 차별적인 말을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혐오 세력이 내뱉는 말을 ‘여론’으로 용인하는 지방자치단체였습니다. 인권 제도가 지자체의 치적 쌓기로만 이용되며 관성적으로 운영될 때, 혐오와 차별이 정당한 의견으로 수용되며 제도가 후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부족하나마 인권 제도를 의미 있게 만들어나가고자 했던 인권운동이 어느 새 인권 제도 자체를 지키는 데 급급해진 배경입니다. 그렇기에 ‘인권운동의 제도화’를 시작점으로 삼아 ‘제도의 인권운동화’를 향해 나아가자는 제안이 의미 있게 들렸습니다.
운동의 연결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토론자인 박진 님(다산인권센터), 채민 님(전북평화와인권연대), 이진희 님(차별금지법제정연대/장애여성공감)은 각 지역에서 혐오 세력과 대치하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운동의 연결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나눠줬습니다. 이미 조직적으로 결집한 혐오 세력에 개별적으로 맞서는 일은 쉽지 않을뿐더러 지역 운동에 깊은 내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권과 평등의 가치 아래 모여서 함께 싸워나갈 수 있을지 논의를 이어나갔습니다. 지역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사이의 네트워킹과 반차별 연대에 대한 제안은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주기도 했습니다.
플로어 토론에서도 다양한 분들이 말씀을 나눠주셨습니다. 그간 연결 고리가 없었던 지역의 활동가들이 각 지역의 상황을 공유해주시기도 했으며, 고립을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 아이디어를 말씀해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인권운동이 행정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혐오 세력과 어떻게 맞서야 할지, 운동의 고립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 모두 명확한 답을 얻기는 힘든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토론회 현장에 모인 서로를 발견하고 고민과 아이디어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혐오를 넘어서는 운동의 연결이 첫 발을 떼기 시작했다고 느꼈습니다.
토론회 마지막에는 「혐오와 차별의 증가를 막기 위한 세계인권도시포럼 참가자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혐오와 차별에 함께 맞서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이었어요. 세션 기획단의 제안으로 포럼 기간 동안 각국의 참가자들에게 연명을 받았는데요, 총 128명의 포럼 참가자들이 연명해주셨습니다. 이후 혐오에 맞서는 활동의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국 인권활동가들의 네트워킹
서로 다른 지역의 활동가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으니 그냥 헤어지기에는 아쉬웠습니다. 토론회가 끝난 뒤에 전국에서 모인 인권활동가 30여명이 함께 저녁 식사를 진행했어요. 미처 나누지 못한 인사와 안부를 나누고 토론회에서 나눴던 운동의 연결을 위한 고민도 이어갔습니다.
지난 2017년 인권단체연석회의에서 인권운동더하기로 전환할 당시 목표로 삼은 역할은 ‘인권운동의 교류와 연결을 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전국인권활동가대회, 신입 인권활동가 공동교육, 한국인권보고대회 등의 사업을 해왔거나 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번 세계인권도시포럼 세션을 준비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점은, 더하기가 촉진하려 했던 운동의 교류와 연결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부족했는지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역시나 명확한 해답을 찾기 힘든 고민이겠지만, 적어도 이 날과 같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지금보다 더욱 많아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운동의 연결은 바로 그러한 자리부터 시작될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