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사랑방은 20년 활동을 돌아보며 앞으로 우리의 운동전략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 긴 논의를 시작했고, 핵심적인 키워드는 ‘조직화’였다.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세상을 바꿔내자는 운동의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졌다. 인권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되거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나 배려와 같은 말로 이해되기 십상이었다. 사랑방의 고민은 신자유주의 이후 만들어진 사회의 흐름을 끊어내고 다른 흐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다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말할 수 있도록 조직을 만들고 복원시키는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무엇을 조직할 것인가
사랑방의 운동전략에 대한 고민은 반월, 시화공단의 노동자를 조직하는 활동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6년이 넘는 시간 꾸준히 공단의 노동자들을 만나왔다. 그렇다고 사람을 모아서 조직을 만드는 일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사람을 모으기만 해서 저절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모이자는 이야기가 부족해서 지금껏 사람들이 모이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조직화가 어떤 힘에 맞서기 위한 조직화인지 더 묻지는 못했다. 오히려 체제에 맞서는, 변혁을 위한 조직화의 중요성 그 자체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2019년 세 차례에 걸친 워크숍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체제에 맞서는 조직화가 중요하다면 그에 맞는 다음 질문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2019년 세 차례 워크숍을 통해 체제에 맞서기 위해 무엇을 포착하고 조직할 것인지를 묻고, 구체화시켜 나가보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첫 번째 워크숍에서 지난 10년, 한국 사회의 경쟁과 생존의 문제가 세대, 계급, 젠더를 경유해 드러나고 있는 양상을 살폈다. 두 번째 워크숍에서는 이 양상을 고착시키고 있는 물적인 토대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마지막 세 번째 워크숍에서는 앞선 워크숍에서의 논의가 공단이라는 공간에서는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그래서 사랑방이 조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공단 조직화, 싸움을 만들자
흔히 신자유주의라는 바람이 불면서 비핵심 노동력은 외주화되고,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나빠졌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만 이야기할 때 놓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노동자의 권리이다. 비정규 노동자가 싸움에 나서면 흔히 볼 수 있는 슬로건 중 하나가 ‘직접고용, 정규직화 쟁취’다. 또한 이 요구를 내건 노동자들은 늘 고임금이나 노동조건 때문에 싸움에 나선 게 아니라 죽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싸운다고 말한다. 이는 ‘고용’이라는 관계를 통할 때에만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사회의 시스템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외주화는 이 고용관계를 흔들며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사용’하도록,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책임을 기업이 지지 않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노동자의 권리가 현실에서 드러나는 결과에 불과하다.
반월, 시화공단에서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보면 큰 공장이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작은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과거에는 대공장이었지만 이제는 라인별로 소사장을 주고 개별 업체로 쪼개져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영세 업체에서 고용하지 않고 파견업체를 통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공단의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직접고용이라는 요구는 무기력한 구호에 불과하다. 그나마 대기업과 직접적인 원·하청관계를 맺고 있는 공장의 노동자라면 원청이 책임지라는 요구를 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공단의 많은 영세 사업장은 여러 업체에서 주문하는 부품을 납품하기 때문에 원청을 특정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영세 업체일 따름이다.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영세 업체의 정규직이 돼서 노동 조건을 두고 사장과 얼굴 붉히며 씨름을 할 바에는 좋은 기회를 기다렸다 큰 공장으로 옮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나은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고용 관계를 회피하는 자본이 만든 풍경은 공단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25~30만 명의 노동자가 반월, 시화공단에서 일하고 있다. 제조업 수출 경기가 풀리면 30만이고 경기가 어려우면 25만 명이라고 말하지만, 말이 5만 명이지 엄청난 인원이 실업과 고용을 반복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5년 월담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반월, 시화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업체별 평균 근속기간은 평균 4.1년이지만 공단에서 일한 기간은 두 배 남짓인 평균 8.8년이라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제조업이라는 특성으로 전형적인 근로계약관계를 맺지만, 자본과 노동자가 맺는 실질적인 관계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싸움을 만드는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개별고용관계를 넘어선 노동관계에 대한 싸움과 요구를 만들어 내야한다. 조직화의 출발은 여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싸움을 만들기 위해선
개인적으로 워크숍을 하면서 사랑방에서 나의 활동을 돌아보고 반성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사람이 아니라 운동을 조직해보자고 이야기는 했지만, 마음같이 사람이 모이지 않을 때 어떻게 조직을 만들고 싸움을 만들지?’ 라는 고민에 갇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의 노동법 체계가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하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생각하면 열심히 싸움의 판을 만들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모일 수 있었다. 허울뿐인 법체계도 노동자가 싸움에 나선 결과로 구체화되고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프리랜서나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을 노동으로 만드는 것은 법이나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 노동자들이 고용관계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법과 제도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려고 할 때,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와 싸움을 벌여나가기 때문에 일부나마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반월, 시화공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공단 노동자가 나설 수 있는 싸움의 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세 차례의 워크숍을 거친 만큼 2020년 조직화 계획은 예년과는 달라지도록 만드는 게 중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