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전태일 3법’으로 불리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근로기준법 및 노동조합법 개정에 관한 국민동의청원이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성사되었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한 입법 투쟁의 결과다. 하지만 국회로 넘어간 전태일 3법의 미래는 밝지 않다. 국회 180석을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대한 당론 채택을 머뭇거리다 이제는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는 수준의 입법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게다가 지난 6월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제출한 노동조합법(이하 노조법) 개정안은 ILO 주요 권고 사항들을 담기보다 노조 활동에 큰 제약을 가져올 수 있는 방향으로 제출된 상태다. 국정감사 이후 법안의 정기국회 논의를 앞두고 민주노총은 이미 이달 초부터 전태일 3법 쟁취와 함께 정부의 노조법 개정안 저지를 목표로 국회 앞 농성에 돌입했다.
전태일 49주기였던 1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며 열사의 뜻을 계승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올해는 역대 고용노동부 장관 중 처음으로 이재갑 장관이 전태일 열사 묘역을 찾으며 다시 한 번 노동존중사회 실현을 약속했다. 출범 당시부터 ‘노동존중’을 기치로 내걸었던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왜 다시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걸고 싸우게 되었을까.
‘노동존중’은 문재인 정부에서 어떻게 제도화되고 있나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 했던 전태일의 시대는 물론이고, 노동개혁의 이름으로 노동개악을 밀어붙였던 박근혜 정권을 떠올려본다면 문재인 정부가 내건 ‘노동존중 사회’는 가슴을 뛰게 만드는 슬로건이었다.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사회적 요구로 탄생한 촛불정권에서는 ‘노동’이 멸시가 아니라 존엄과 자긍심의 언어가 될 것이라는 기대, ‘노동자’가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정당하게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했다.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을 통해 실현되는 노동존중 사회를 약속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동존중사회에 가닿기보다 ‘파격’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무용지물’이라는 말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는 자회사 고용 방침을 활용한 무기계약의 ‘중규직’의 확대로 대체되었고, ‘노동시간 단축’을 내건 근로기준법 개정 역시 주 52시간 적용 외예를 확대하고 시한을 유예하는 방식으로 무력화되기도 했다. 태안화력발전 고 김용균 사망을 계기로 30여 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면서 ‘위험의 외주화’를 막겠다고 했지만 산업재해로 죽는 노동자의 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비정규직부터 플랫폼 노동자, 문화예술노동자에 이르는 사각지대를 단계적으로 해소해나겠다는 ‘전국민 고용보험 확대’는 일부의 노동자에게만 적용될 뿐, 상당수의 노동자는 차기 정부의 몫으로 미뤄놓은 상태다. 위 정책들은 대체로 기존의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을 통해서 권리를 보장받기 어려운 비정규직, 5인 미만 사업장이나 다층적 구조로 이루어진 도급․하청업체의 노동자,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대안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가 정부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 주체들의 양보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타협과 양보의 테이블 위에 협상의 대상으로 올라온 것은 어김없이 노동자의 권리일 뿐이었다.
정부가 말하는 ‘노동존중’의 의미
문제는 정부 정책이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 배경을 재계의 부담으로 인한 반발, 경기침체와 고용 하락에 대한 우려, 점진적 개혁을 위한 단계별 전략이라는 식으로 선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 문재인 정권의 노동정책에 대한 날선 비판들은 바로 문재인 정부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왔던 ‘노동존중’이라는 관점의 전제, 존중받아야 하는 ‘노동약자’ 집단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겨냥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 취약계층’의 후견으로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면서, 보편적인 노동권 보장에 대한 요구는 쉽게 특권으로 치부해왔다는 점이다.
더 이상 정규직-비정규직의 고용형태로 한국의 노동시장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노동의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한지 오래다. 일자리가 아니라 ‘일감’을 중심으로 노동력이 배치되고, 노동자는 임금이 아닌 ‘수수료’를 받으며, 퇴근 대신 ‘업무종료’를 한다. 노동자라는 정체성 역시 개인사업자, 프리랜서, 때로는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대체되고 있다. 사용자가 명확한 근로계약 관계가 해체되고 있다는 것은 기존 노동자의 권리보장체계를 회피할 수 있는 형태로 노동시장이 조직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른바 ‘노동자 없는 노동’은 노동자의 권리 보장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채로 ‘노동력’만을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의 확장이기도 하다. 특수고용노동자, 실업자 및 구직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이 정부의 주요 공약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시장의 변화로 인한 것이다. 학습지교사와 보험설계사 같은 오랜 직종뿐만 아니라 플랫폼을 기반으로 새롭게 재편된 택배기사나 대리기사, 문화예술노동자와 프리랜서 등 대다수의 노동자는 기존의 제도에서 노동자라는 지위와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정부의 ‘노동존중’ 정책은 노동자라는 집단이 가지는 권리를 인정하고 적용 범위를 확장하기보다는, 취약한 노동자에 대한 지원과 배려만을 강조하며 ‘기득권 노동자 vs 노동약자’를 양분하는 구도를 만들어왔다. 민주노총 파업에 대한 정부의 지속적인 우려,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선언, “자기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게 아니라 대화와 타협, 양보와 고통 분담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찾자”는 호소, “한 번도 파업하지 않은 자랑스러운 전통”에 대한 격려까지, 이러한 정부의 행보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과 같은 노동자 조직을 겨냥한다. 물론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 노조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내의 ‘힘센 자’의 위치라는 비판,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에 집중하는 기업별 교섭이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인하와 근로조건 악화의 지렛대로 작용한다는 지적은 정당하다. 하지만 변화한 노동구조에서 ‘노동약자’가 놓인 불평등과 무권리 상태가 기득권 노조의 노동권이 과도하게 혹은 무분별하게 보장된 결과인가? 이른바 기득권 노동자의 권리는 국가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선별되어 배제할 수 있는 재량의 영역인가?
현재 정부의 태도는 마치 소수의 기득권 노동자에게만 노동3권이 주어진 현실이 문제인 것처럼 호도하고, 기득권 노동자들의 권리를 빼앗아 ‘노동약자’의 지위에 놓인 사람들을 지원하고 배려하는 정책을 펼치면 노동존중이 실현된다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노동이 존중되지 못하는 사회는 바로 그 미조직 노동자들이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되어야 할 노동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유지된다. 문화예술인의 고용보험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고용노동법 상 특례조항을 통해 문화예술인을 포함하는 법안에는 반대했던 당사자들은 정확하게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가난하니까 지원한다는 ‘떡 하나 주기’식 복지는 여전히 문화예술인을 ‘노동을 제공하고 소득을 얻는 노동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들이 ‘특별대우’가 아닌 ‘사회안전망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복지가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다른 특수고용직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본이라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노동자의 권리보장체계를 차별 없이 확대하고 보편적으로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드러낸다. 위계화된 노동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고용형태나 노동조건은 이미 천차만별이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통해 싸울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싸움의 조건을 만드는 시작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노동-자본의 사회적 힘에 따라 관철되는 것이라면 노동자 권리의 핵심은 일의 세계에서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대한 자본과의 협상 역량을 높이는 것, 이를 위해 집단으로서 모이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대공장이나 공공기관 중심의 정규직 노조에 속하지 못한 노동자, 산별이 아니라 기업별 노조 중심의 체계에서 힘을 모으고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다양한 형태의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단결과 단체행동을 통해 협상할 수 있는 노동3권이 더욱 중요한 권리일 수밖에 없다. 전태일 3법에 포함된 노조법 개정은 소수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나 개별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다, 전통적 ‘사용자-노동자’라는 근로계약관계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노동자의 보편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하지만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정부의 노조법 개정안은 노동의 기준이 되는 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존의 전통적인 근로계약관계에서 보호받아왔던 노동자들이 싸울 수 있는 조건들을 무력화하고 있다.
만약 노조가 쟁의행위의 한 방법으로 사업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진행하는 것이 금지된다면 어떨까? 부당해고를 일삼는 회사 내에서 해고자와 여러 연대 단위가 모여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피켓팅을 하면서 문제를 알리려고 할 때, 그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 외에 아무도 회사의 승인 없이 출입할 수 없다면 어떨까? 정부안은 사실상 부분적인 직장점거를 금지할 수 있어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 자체를 제약할 뿐만 아니라, 자격에 따라 사업장 출입과 노조 활동에 제한을 두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면서 산별노조의 임원 및 조합원들이 함께 연대해서 싸울 조건, 특수고용 및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개별 업체를 넘어서서 단체행동하고 싸울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크게 위축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정부안대로라면 ILO에서 계속 개선을 권고해 온 250만 명에 이르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 350만 명 규모의 하청·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진짜 사장’인 원청과 교섭할 권리, 공통의 조건에 놓인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연대할 권리는 쪼개지거나 삭제될 수밖에 없다.
해당 노조법 개정안 비판에 대해서 정부는 “합리적인 수준으로 적절한 대안이 제시된다면 그 내용이 반영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이 말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정부가 보편적 노동권 보장과 확대를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가 아니라 사회적 타협과 협상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노동존중사회를 다짐하는 동시에 노동3권을 제약하는 법안이 제시될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노동권은 국가의 재량에 의해서 획득되지 않는다. 최근 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모여 노조법을 개정하고 노조할 권리를 쟁취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정부가 시혜적으로 제공하는 ‘노동존중’을 받는 위치에 머물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싸워나갈 수 있는 조건을 노동자 스스로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것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 1969년 전태일 일기 속 진정서
2020년 전태일 3법이 내용은 50년 전 전태일 시대의 요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갑질119의 ‘전태일 50년 직장인 인식조사’ 결과에서는 1970년대 경공업에서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2020년대가 되었지만 비정규직, 5인 미만 사업장, 노조 밖 노동자, 20대, 비사무직, 저임금 조건에서 불안정 노동을 강요당하는 법 밖의 전태일들이 여전히 한국사회의 다수라는 현실이 드러난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고,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전태일3법 제정 요구는 2020년 노동하는 전태일들이 외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로서 사회에 등장했다. 전태일 3법이 노동 현실과 노동자의 삶에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위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싸움을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50주기를 앞두고 정부가 ‘산업 민주화와 노동인권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전태일 열사에게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훈장을 서훈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1960~70년대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속에서 전태일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은 노동자가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주체로 인식하고 선언하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전태일 정신’으로 지금까지 계승되어 온 것은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산업화 정신이 아니라 한 인간이라도 ‘부스러기’로 밀려나지 않도록 노동자의 보편적인 권리를 관철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이었다. 벌집 같은 평화시장 속 ‘사람’이라는 기계가 돌아가는 1.5m 높이의 다락방에서, 일당 50~70원을 받고 ‘타이밍’이라고 불리는 각성제를 마시면서 12~15시간 일해야 했던 장시간 저임금 노동자들이 노동권을 되찾기 위해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고 서로를 조직하고 싸워온 힘과 시간이 만들어낸 정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2020년 지금, 전태일 3법이 ‘노동자 없는 노동’ 시대에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다시 묻는 싸움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