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신종 코로나)으로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지난 1월 21일 국내 최초로 확진환자가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23명(2월 6일 기준)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아직까지 사망자가 없고, 완치자가 나오고 있으며 방역당국과 전문가들은 지역사회 전파로 이어지고 있진 않다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모임과 행사들이 연이어 취소되고, 텅 빈 거리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실제 느끼는 두려움은 훨씬 커 보인다.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과 감염병 확산을 한국사회가 처음 겪는 건 아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로 186명이 감염되었고 38명이 사망했다. 뼈아픈 경험이 남긴 결과, 신종 코로나의 경우 기존 방역 대처보다 나아진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2015년 국내에서 메르스 증세를 인지한 환자의 확진 검사를 오히려 거부해 초동 대처에 실패한 질병관리본부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또한 감염병 환자에 대한 추적 관리와 정보 공개, 감압 병상의 확보와 운영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정부와 방역당국이 초동 대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방역체계가 작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아직까지 안심할 순 없지만 신종 코로나의 치사율은 메르스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예상되면서 2015년과는 다른 형국이다.
공포가 확산되는 이유
그럼에도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는 줄어들고 있지 않다. 아직 정확한 발생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 백신도 개발되지 않은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과 공포는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더 나아진 대처와 감염병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미 만연한 공포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살펴봐야하는 것은 특정 질병 자체보다 이를 둘러싼 현실이다.
‘내가 신종 코로나에 걸리면 어떻게 될까?’ 제대로 된 정보조차 제공받지 못했던 메르스 사태와 비교하면 정보의 유통 양상은 다르다. 감염된 환자가 어떤 동선으로 움직였는지, 지금은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그래서 어떤 치료법을 쓰고 있는지가 시시각각 보도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후에 펼쳐질 삶을 가늠하지 못한다. 확진 이후 격리 치료를 받는 사람의 생계는 어떤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할지, 주변 관계는 문제가 없는지, 병을 이겨내도 차별받거나 낙인찍히지는 않을지 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감염병을 피하기 위해 확진자의 동선을 확인하는 일과 마스크 쓰기, 손 씻기, 딱 여기까지다.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고, 예방에 힘쓰는 일을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중 화장실에서 손을 씻지 않고 나가는 이라도 보게 되면, 예방노력을 혼자 열심히 한다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나와 공동체를 위해 예방에 함께 힘쓰는 위치로서의 시민이 아니라, 노력보다는 운에 의해 위험에 노출되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시민의 자리는 신종 코로나에 감염되면 가늠조차 되지 않는 부담을 느껴야 하면서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감염을 피할 수 없는 불안한 위치인 것이다. 개인은 이 불안한 자리라도 버텨내기 위해 각자도생이라는 생존법을 선택한다.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가 연일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더 ‘강한’ 방역 대책요구로만 반복되는 이유다.
‘강한’ 대책은 두려움을 키운다
문제는 각자도생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회로 속에 우리가 갇히게 되면, 내가 하고 있는 노력은 나를 포함한 타인과 공동체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대로 타인의 노력도 각자도생으로만 인식되면서, 이미 우리는 질병을 함께 겪고 있음에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의 노력과 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신종 코로나에 홀로 맞서야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정부가 적절한 대책을 만들고 집행에 나서도 부족하게 느껴지고, 더 ‘강한’ 대책을 펼치지 않는 것이 무책임한 태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 적절한 대책과 강한 대책은 다르다. 소위 강한 대책은 국경 봉쇄나 전수조사와 같이 주로 감염과 비감염 상태의 경계를 분명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경계는 방역의 차원에서만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방역을 넘어 공동체의 경계를 만드는 일은 오히려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공포를 키울 뿐이다. 공포는 질병과 상관없는 혐오와 배제의 자양분이 되고, 감염이 확산될수록 더 ‘강한’ 대책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는 소모적인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방역당국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라는 요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요구되는 ‘강한’ 대책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인 입국 금지요청만 봐도 그렇다. 질병에 대한 방역이나, 감염예방이 아닌 특정 국가, 지역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미 거리 곳곳에서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문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중국 외의 국가에서 신종 코로나에 감염돼 입국한 환자가 한국에서 발생했다. 감염자가 많은 국가라고 입국을 금지시키는 일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것이다. 한국처럼 중국과 교류가 많은 나라에서 하루아침에 입국을 금지하면 오히려 관리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크다. 방역을 걱정한다면 100% 봉쇄나 차단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떻게 관리해나갈 것인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오해는 하지말자. 강한 대책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안전을 바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묵살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시민들이 겪는 두려움은 신종 코로나라는 질병 그 자체 너머에 있다는 점을 읽어야 한다.
신종 코로나가 재난이 되지 않기 위해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에서 의미가 달라진 단어 중 하나는 ‘재난’이다. ‘재난’은 여러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불운한 사건에서 오랜 기간 사회 시스템의 실패가 누적되면서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재난의 배경으로 가려진 사회 구조의 문제를 짚어낸 것이다. 이런 의미 변화는 재난의 해결과정 역시 바꾸어 놓았다. 해당 사고의 수습만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과정까지 포함하도록 말이다.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나간다는 측면에서 ‘정치’의 과정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해야 하는 지금도 적용된다.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이라는 사건이 재난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해결 과정이 바이러스 방역 대책 이상으로 감염병에 대처하는 사회적 역량을 키우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과정에서 각자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이라는 사건을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함께 겪고 해결해가는 사회적, 집단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재난에 맞서는 시민의 정치
신종 코로나에 대처해나가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이 현실은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겪고 있다는 점이다. 신종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은 자신의 이동 경로, 건강 상태 등을 공공의 안전을 위해 공개한다. 감염 환자를 돌보는 노동자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뻘뻘 나는 방호복을 입은 채 교대 근무에 들어간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곳곳에 손세정제가 비치된다. 학교와 유치원이 멈추고, 신종 코로나와 유사한 증상이 있으면 스스로를 격리한다. 이미 감염된 사람과 치료와 방역에 힘쓰는 노동자는 물론, 감염되지 않은 시민까지 모두가 이 상황을 함께 겪고 있다. 생존은 각자의 몫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완전한 대책이나, 나만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라 모두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목표를 가진 관계 속에 있음을 직시한다면 그 다음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는 일이다. 각자도생의 상황에서는 단지 바이러스를 전파할지도 모르는 매개체로만 타자를 보게 되지만, 이 상황을 함께 겪고 있는 공동체에 속한 동료 시민의 관계가 된다면 모든 게 달라진다. 그렇게 각각의 행위자가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할 때, 시민의 요구는 전문가들의 방역문제에서 정치의 장으로 이동한다.
감염 의심 증상을 느끼는 사람에 대한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누구라도 증상을 느끼고 스스로 격리를 결정할 때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치료와 방역을 하고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이들이 지쳐 쓰러지지 않기 위한 충분한 휴식과 지원은 이루어지고 있는지부터 보게 된다. 혐오와 거짓 정보로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해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의 안전을 위한 제대로 된 정보를 요구하고 소통할 수 있는 창구는 마련되어 있는지 등을 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문가나 방역 당국이 신종 코로나 문제의 해결을 그저 바이러스가 없는 상태로의 복구로 본다면 시민의 요구는 거기서 그칠 수 없다. 이후에도 충분히 발생 가능한 신종 바이러스 출현에 비슷한 공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종 코로나를 정치적 사건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처하는 공동체 시민으로서 필요한 요구와 권리를 구성해내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武汉, 加油(우한 힘내라) 와 We are Asan(우리가 아산이다)
위의 두 문구는 시간이 지나도 신종 코로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기억날 장면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중국 후베이성의 우한이 봉쇄된 이후 남아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며 연결을 찾고 힘을 얻으며 외친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한의 한국 교민이 지낼 시설이 아산으로 지정 되면서 지역의 반대하는 목소리에 맞서 환대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문구였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함께 재난에 대처해나가는 시민의 정치를 보여준 한 장면이었다. 바이러스의 공포에 짓눌리지 않고 신종코로나에 맞서 정치의 장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시민의 정치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메르스 이후 방역체계가 달라졌듯이, 신종 코로나를 함께 겪으며, 위험에 함께 대처하는 사회의 역량을 키워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