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길내는모임)의 쟁점토론회를 마치고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재밌었다’는 평가였다. <반-윤석열전선을 넘어서는 사회운동의 다른 전선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제목에, <체제전환운동의 세력화를 시작하자>고 발제하는, 누군가에게는 무겁거나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는 토론회가 재밌었다는 말들을 곱씹게 됐다.
우리의 정치적 전망을 만들자
가벼운 주제는 아니었다.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정부 여당이 보이는 행태는 상식을 끝없이 허물어뜨렸다. 국회 과반 의석을 점유한 제1야당이 유의미한 비판 세력이 되지 못하는 현실도 나날이 확인되었다. 정부여당을 비판하거나 더불어민주당의 한계를 지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역할이 비판자에 그칠 수는 없다.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고 고군분투해오지 않았나. 우리의 목소리가 눈덩이처럼 불어가기보다 건건이 항의하고 규탄하는 걸 넘어서지 못하는 데는 우리가 변화해야 할 몫이 있지 않을까?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사회운동의 주장과 요구가 민주당보다 조금 더 왼쪽에 있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사회운동은 오래전부터 민주당과 그 정부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서 별 차이가 없다고 비판해왔지만 개별 의제들에서 민주당을 통한 제도화를 목표로 삼은 역사도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정부와 국회를 향해 어떤 요구를 하고 변화를 만드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 변화에 대한 상상이 제도를 개선하거나 개악을 막아내는 것에 그칠 때, 제도정치에서 더 큰 힘을 가진 세력에 기대는 경향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 들어 지자체까지 노골적으로 사회운동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 무력감이 커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회운동의 역사가 제도정치 지형에 따라 이렇게 흔들린다면 그것은 사회운동이 제 땅에 제 발로 서지 못한 때문은 아닐까? 87년 민주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을 퇴진시킨 촛불에 이르기까지 사회운동이 어디에 있었는지 돌아본다면 사회운동에 정치적 성격이 내재해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일상으로부터 사회구조의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관계와 힘을 조직하는 역할이 사회운동에 있다. 그렇다면 사회운동 역시 우리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정치적 전망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문제를 낳는 체제를 직시하며
촛불 이후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늠하게 하며 변화를 만들어온 운동들이 있다. 윤석열 정부가 여가부를 폐지하겠다고 고집 피워도 미투운동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며, 차별금지법 제정이 기약 없다 느껴져도 공중파 방송에서 동성애 찬반토론을 하던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정부가 노동조합을 반(反)공정세력으로 몰아가도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이 줄어들지 않고, 엉망진창 포장하는 수준일지언정 기후위기에 입을 떼지 않는 정치를 상상할 수 없다. 이런 변화의 조건을 제도정치가 개별 요구를 수용하게 하는 배경으로 삼는 동안 사회운동이 쌓아온 힘마저 흩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세상을 바꾸는 힘이 서로 기댈 수 있게 단단히 엮어가는 일에 도전해야 한다.
길내는모임은 체제전환운동으로 세력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한국 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공적 토대를 남김없이 허물고, 더욱 많은 것들을 금융화하면서 불평등은 극심해졌다. 서로 돌보고 기댈 수 있는 조건과 관계는 파괴되고, 여러 구분선을 따라 혐오가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다. 생태적 한계를 무시해온 자본의 착취는 기후위기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돌아오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나 부족주의가 한국사회만 겪는 일이 아닌 데서도 우리의 시야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사이에 가두면 안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회운동도 눈앞에 보이는 문제들에 당장의 대책을 내는 것과 다른 시야와 호흡으로 자신의 전망과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가계부채가 문제니 부담을 완화하자거나, 사교육이 문제니 킬러문항을 없애자거나, 안전하지 못한 사회니 공권력과 그 기능을 강화하자거나… 당장의 문제를 멈추기 위한 대책만큼 문제를 낳은 구조를 바꾸기 위한 계획도 중요하다. 보수양당은 전자에 대해서는 목소리 높이며 다툴지 몰라도 후자에 관해서는 일치한다. 사람들을 개인으로 흩어놓고 살아남을 책임을 더욱 개인에게 떠넘기는 구조는 주거니 받거니 강화한다.
‘원대한 이상’으로 쪼그라들지 않게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진단으로부터 당장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까지 아우르는 무언가를 만들어보자 하면 엄두가 안 나는 막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사회운동들 안에 쌓여온 문제의식과 대안들을 연결시키는 것에서 시작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의 오래된 문제 중 하나인 과로는 법정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것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일감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특수고용노동자나 플랫폼노동자, 소득이 부족해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시간제 노동자, ‘집안’에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떠안게 되는 여성의 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근로계약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성차별구조와 사회보장 체계의 변화를 함께 만들어갈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소수의 문제로 인식되는 의제들을 우리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결시키는 방식으로도 만날 수 있다. 동성혼과 생활동반자 관계의 제도화가 가족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통해 재생산되는 성별 이분법과 ‘가족’에게 떠넘겨진 사회재생산 기능을 흔들고 재구성하는 계기로 만들어가야 한다. 전세사기 대책이 또 다른 대출상품 만들기로 이어질 때, 주거가 재산이 아니라 권리가 되게 할 공공성의 조건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각자의 영역에서만 대안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과제들이 너무 많다. 당장 모든 문제에 해답을 구할 수 없더라도 서로를 가로지르며 틔울 수 있는 전망은 훨씬 더 풍성해질 것이다.
활동하면서 이런 고민들은 곧잘 나누지만 당장 해야 할 일들에 쫓기다 보면 활동가 개개인의 마음속에 품은 ‘원대한 이상’으로 쪼그라들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늘 하던 요구를 반복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원대한 이상’이 실제로 원대한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잘 정리해서 보여줄 누군가가 따로 있지도 않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를 구하는 수밖에.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체제전환’이나 ‘세력화’는 누군가에게는 너무 추상적인, 누군가에게는 너무 낡은 말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운동의 고민과 경험이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자리들이 더욱 많아져야겠다. 그래도 무거울 수도 막연할 수도 있었던 토론회가 ‘재밌었다’면, 참석했던 이들이 무언가 다르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제안 내용 자체보다 저마다 서있는 자리에서 한 발 더 내디뎌보고 싶은 동료들을 만난 즐거움이었을 수도 있다. 토론회를 마치고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오래된 말을 떠올려봤다. 꿈자리를 찾아다닐 수는 없으니 이제 현실에서 바지런히 움직일 일이 남았다.
* 토론회 자료집은 사랑방 자료실(클릭!)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