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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9월의 책모임 『내전, 대중 혐오, 법치』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오 게강 저, 정기헌 역, 『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원더박스, 2024.

 

 

사랑방 상임활동가들이 격월로 책 한 권을 추천하고 함께 읽는 <이달의 책모임>도 어느덧 세 번째, 9월에는 미류 활동가의 ‘픽’으로 프랑스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 학자들이 쓴 『내전, 대중 혐오, 법치』를 읽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그 출발부터 ‘자유’의 이름으로 ‘평등’에 맞서는 내전을 전략으로 택했다.”

저는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준비가 한창이던 3월 초, 정치대회 장소 답사를 가는 길에 책의 첫 장을 펼쳤던 기억이 납니다. 총선을 앞두고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은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막막하고 심란한 마음, 사회운동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자본에 맞선 '민중의 세력화'에 나서자고 호기롭게 시작한 체제전환운동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하는 마음이 서로 엉켜서 공존하던 시기였는데요. 비차별 원칙은 ‘자유의 제약’이고 노동조합은 '건폭‘으로 여기는 정치 세력과 ’먹사니즘‘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지만 차별은 바로 그 먹고사는 문제와 상관없다는 정치 세력 사이에서 대중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는 와중에 저 문장에 이끌렸던 것이라고 포장해봅니다.

책 제목인『내전, 대중 혐오, 법치』의 세 가지는 저자들이 짚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통치 양식입니다. 책의 원제가 ‘내전이라는 선택(Le choix de la guerre civile)’인만큼,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전략은 바로 “연합한 과두 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인 ‘내전’입니다. 내외부의 적대 대상을 결합시키면서 ‘자유의 적’을 구성하는 동시에 (예를 들면 내부의 적인 좌파․노동조합과 외부의 적인 이민자) ‘진짜 인민’을 호명․동원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분할 전략은 증오를 선동하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혁명의 가능성을 가두어버립니다. 하지만 지배 세력이 인민 일부를 조직하고 동원한다고 해서 인민주권 혹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리프먼, 미제스,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의 선구자이자 신자유주의에 핵심적인 사상을 제공한 이들은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우매한 대중의 여론 제압하면서 권력을 제한하고, ‘자유’의 이름으로 개인의 선택과 사적 소유의 원칙을 확고히 할 소수의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했습니다. 대중 혐오에 기반해 온 역사 속에서 신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엘리트주의적․권위주의적이며 반민주주의적 성격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법을 이용한 지배’는 바로 이러한 대중 혐오를 실현하고 제도화하는 전략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정치체제로 유형화할 수 없을 만큼 국가․지역․역사에 따라 그 모습 또한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다른 양상의 ‘법치’를 통해 다수의 국가를 신자유주의 국제 경제 질서로 연결시킵니다. 자본 소유를 보호하기 위한 다수의 초국적 사법(私法)은 바로 시장경제와 대립되는 모든 국가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자본주이 체제의 역사적 시도가 축적된 결과이고, 그 영향력 아래 인권과 국제법은 지속적으로 무력화되었습니다.

“노동조합주의, 생태주의, 대안 세계화주의,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등의 동맹을 조직해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투쟁 주체들이 다른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투쟁에 통합해 나감으로써 평등을 위한 싸움의 모든 차원을 구체적으로 접합해나가야 한다.”

내전을 획책하는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를 거부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저자들이 제안하는 것은 바로 ‘평등과 민주주의 전략’입니다.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시장지상주의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통합하고 지배하는 계보학적 사회 질서이자 끊임없이 변주․갱신되고 있는 정치 전략으로서 탐구하는 이 책의 매력 또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이제는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며 모호하다고 여겨지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다시금 급진화합니다. 신자유쥬의가 벌이는 ‘내전’의 목표이자 효과가 모든 형태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무력화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방대하고 깊은 역사적 분석을 통해 밝히는 만큼, 바로 그 내전에 대항하는 혁명의 가능성이 평등을 위한 사회적 투쟁들의 동맹을 이루는 것에 있다는 주장 또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복합적 모순에 맞서고 있는 대항주체들을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가치를 목표이자 수단으로서 삼으면서 다양한 인민 계급을 재구성하려는 조직화 전략, 구체적인 ‘교차’와 ‘접합’의 투쟁 전략을 만들어낼 과제를 사회운동에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체제전환운동으로 주구장창 이야기해왔던 ‘가로지르길’이 바로 이런 방향일까?!)

신자유주의가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변형 혹은 회귀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의 한계와 실패를 넘어서려는 강렬한 열망과 치열한 노력 속에서 시작되었고, 내전-대중 혐오-법치를 실행하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통해 확장․지속되어 왔다는 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획경제, 인민주권, 대중민주주의의 대척점에서 국가와 정치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신자유주의 기획을 벗어나는 것은, 사회운동이 어떤 대항적 사상과 공동체적 질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넘어설 것인지에 대한 과제를 우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동적 우파의 성공 이면에 ‘진보적 신자유주의’로 변모한 좌파의 실패가 있었다는 점은 비단 서구사회의 ‘사례’는 아닙니다. 반민주주의-신자유주의 보수 정치 세력들이 장악한 한국사회 정치 현실에서 대안적․계급적․보편적 블록을 구축하려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체제의 모순을 역사화․가시화하고 새로운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열어갈 기점 또한 지금 이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운동의 역량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낙담과 분투를 오가면서도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고 또 함께 만들어나갈 사랑방 동료들이 있어서 갖게 되는 전망이라는 생각이 드는, 9월의 책모임이었습니다.

 

+덧)

『내전, 대중 혐오, 법치』를 다 읽고 바쁜 시기를 지나 다시 또 무작정 손에 쥔 신간은 퀸 슬로보디언의 『크랙업 캐피털리즘』인데요. (국가와 민주주의라는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으로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곳곳에 완전한 자본의 구역/구멍이라는 예외적 공간을 만들며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 있는 현실을 사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자로 검색하다 보니 내년에 발간될 차기 저서의 제목이 눈길을 끕니다. 『하이에크의 사생아들(Hayek's Bastards): 인종, 금, IQ, 그리고 극우 자본주의』라니, 아마도『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인 하이에크의 사상이 극단적인 시장주의자들과 대안 우파 형성에 끼친 영향을 어떻게 분석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올해 초 보수언론에 실린 하비에르 말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다보스 포럼 연설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모든 형태의 국가 개입을 “케인즈주의적 쓰레기”라고 칭하는 만큼, 연설은 “자유여, 영원하라!”로 끝납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을 정립하려는 운동의 내부에서 태동한 극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도 머지않아 번역되어 출간되길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