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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다른 세상을 만나고, 만드는 우리

사회운동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는 익숙하죠. 차별금지법 제정운동도 수없이 외쳤던 문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가끔씩 2022년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 곳곳의 투쟁 현장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떠났던 ‘봄바람 순례단’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봄바람 순례단의 공식 명칙은 <다른 세상을 만나는 40일 봄바람 순례단>이었습니다. 40일의 순례와 투쟁 현장을 담은 다큐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에는 순례단 명칭에 담긴 이야기가 나옵니다. 평화바람 오두희 활동가는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 ‘다른 세상’은 이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있다고 말합니다. 부정의한 현실과 은폐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공동체가 있고, 그들이 이미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요. 순례단의 이름은 그렇게 다른 세상을 ‘만드는’ 순례단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만나는’ 순례단이 되었습니다.

저도 제정운동을 하다 보면 비슷하게 느끼는 순간이 많습니다. 더 평등하고,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이미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요.

 

평등의 원칙을 ‘진짜’ 올곧게, ‘함께’ 알아가기

지난 11월 15일 저녁 예수회 센터에는 60여 명이 넘는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2024 그리스도인 평등주간 중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평등세상')이 주관한 <차별금지법 “진짜” 바로알기 아카데미>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보수개신교가 진행하는 대표적인 교육사업이 바로 ‘차별금지법 바로알기 아카데미’입니다. 현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도 대표 강사였다는 사실은 웃픈 현실이죠. 이 프로그램을 패러디해 차별금지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최근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 예배 및 큰 기도회>를 전후로 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발 왜곡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 예배 및 큰 기도회>를 전후로 한동안 제 주변은 탄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연합예배가 바로 ‘악법 저지’, 즉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동성혼 합법화’ 저지를 천명하며 열렸기 때문입니다. 동성커플에 대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기독교계에겐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가 흔들릴 수 있는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갔을 거란 점은 기정사실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10월 27일에 연합예배에서 쏟아진 말들은 거의 대부분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가득 찼습니다. 비극은 한국의 주요 교단 거의 대부분이 바로 차별과 혐오를 선동하는 이 집회에 교인들을 대거 조직하며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커다란 공동체가, 자신의 이름이기도 한 공동체의 이름을 내세워 자신 혹은 다른 사회구성원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고 이를 신의 사랑이라는 말로 정당화 할 때, 그 순간의 좌절에 대해서 떠올려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신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평등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 또한 필요합니다. 2024 그리스도인 평등주간 행사는 바로 비극 속에서도 신뢰의 공동체를 구축하고, 종교적 믿음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용기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평등의 원칙’의 상징이 된 차별금지법이 빠질 수 있겠어요.

 

동료를 ‘만나는’ 과정을 더욱 단단하게

한동안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주요 세력을 지칭하는 말은 ‘일부 보수개신교’ 혹은 ‘일부 혐오선동세력’이었습니다. 이 지칭은 제도정치에 영향력을 미치는 개신교계의 부당한 입장이 ‘과잉대표화’ 되었다는 점을 가시화하기 위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핍박받는 이들과 사랑으로 함께 한다는 기독교의 정신을 되새기며 그에 따른 사회적 실천을 촉구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쩌면 ‘일부’라는 과거의 판단을 고수하며 핵심 반대 세력을 담론적으로 상대화하려는 노력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다수의 기독교계가 어떻게 극우 정치화되고 있는지, 이것이 한국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대중언어화 하는 방향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주류 기독교 교단과 극우보수 정치집단이 조우하며 유기적으로 결합되기도, 반목하기도 하는 현재 지형은 비단 반차별․성소수자 운동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이러한 지형 속에서 생성되고 전파되는 혐오와 극우정치 담론이 ‘불안’을 추동하며 대중적인 반동을 확산시키는 조건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엄’, ‘인권’, ‘평등’이라는 말들이 한국사회에서 무력화되는 과정과도, 실제 사람들의 삶과 고통이 은폐되는 과정과도 절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정운동에서도 종교계의 흐름은 늘 중요한 관심사이고, 종교계의 입장은 핵심적인 쟁점이 될 수밖에 없구요.

물론 ‘기독교가 맨날 그렇지’라며 자조하는 것에 그칠 수도 없습니다. 이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종교계와 기독교가 써내려온 또렷한 역사의 의미를 지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 필요한 변화의 방향을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길어올릴 수 있을지를 가늠하기 어렵게 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우리들’은, 그 어떤 곳보다 평등이 가로막혀 있는 현장에서 저항과 연대의 잎을 계속 틔울 수 있어야 하니까요.

“더 나은 시간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신학자 테드 제닝스를 인용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차별금지법이 지향하는 공동체의 모습, 모두가 평등하게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함께 상상하고 만들어가자는 평등세상 정혜진 목사님의 말에서도, 이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 지역에서 왔다는 참여자의 말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진짜” 바로알기가 이끄는 곳은 가짜뉴스에 대항할 수 있는 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정치든 종교든 법을 만들어줄 권력자에게 효과적으로 호소하는 힘만은 아닐 거라는 사실을요. 그 과정은 차별금지법이 “진짜” 필요한 우리를 만나고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투쟁과 연대를 더 단단하고 강력하게 만들어가자는 제안과 용기로 이끄는 것이라고요.

 

다른 세상을 만나고, 다른 가능성을 만들자

“기회 균등과 인종차별 금지, 여성 지위 개선, 아동의 인격 존중, 노동시간 축소, 협동조합의 설치, 최저임금법·소작법·사회 보험법의 제정…”

평등주간 행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바로 직전에 읽었던 ‘개혁 선봉에 섰던 1932년의 기독교’를 짚은 기사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연합 단체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전 NCCK)’가 채택한 사회신조(社會信條)의 조문은 너무나 놀랍지요. 기사에서는 현재 한국 개신교에서 상상하기 힘든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러한 현실 진단에 동의하고, 지금의 현실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러한 과제를 자신의 역할로 여기며 분투해 온 기독교 운동은 약화되었을지언정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 한국사회에서 1932년 기독교의 급진적인 사회 개혁 과제가 가리키는 곳이 비단 종교계만일 수만도 없습니다. 이 과제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이미 다른 세상을 만들고 있는 우리가 새롭게 ‘만나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다보면 ‘봄바람 순례단’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디에서 한 번 승부를 볼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자! 새로운 파열구와 균열을 만드는 일 또한 이어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