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프게 돈을 쓰고 아니, 의지와 무관하게 주머니의 돈을 뺏기고 들어온 것 같은 날 밤이면 손익계산을 안해 볼 수 없다. 다음달 수입이 생기 때까지 하루 몇 개의 토큰과 얼마짜리 점심으로 하루를 때워야 하는가 하는 계산이 나오면 한숨이 안나올 수 없다. 그러나 다음 달의 기약이 없을 때의 상황은 어떠한 것인가? 학교준비물을 챙긴다고 손벌린 아이의 얼굴만 이 왠지 시름시름해 보이는 부모의 얼굴만 비구름처럼 까맣게 보이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와 자신의 생산의 현장으로, 땀흘릴 곳으로, 동료와 어울릴 곳으로 전차바퀴처럼 힘차게 달려가는 거리에서 그 뒷자락의 먼지 속에 숨어야만 하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한 개인의 신세한탄일 수가 없다. 자본주의라는 구조 속에서 해고와 고용불안은 노동자의 영원한 고통이고 항상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구조와 맞물려 자신이 소중히 가꿔온 직장과 조직에서 부당하게 쫓겨나 삶의 터전을 잃어야만 하는 결과를 항상 낳는다. 실제로 5-6공 하에서 전국적으로 노동운동과 관련하여 5.200여명이 해고되었고 93년에도 그 숫자는 3.600여명에 이른다. 이 속에서 92년 결성된 해고자들이 아니며 이들은 해고당할 것을 각오하고 자신의 밑천(?)이 되는 삶의 현장을 제단에 올리고 87년 이 후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해 왔던 조합간부 내지는 선진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모인 것도 당장 개인의 해고문제 해결이라는데 머물기보다는 해고문제의 근본적 해결 내지는 노동운동탄압을 분쇄하여 노동운동을 강화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해투의 문제는 당사자인 해고노동자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현재 전해투의 조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표 (조준호, 기아자동차 해고자), 집행위원장(강중철, 코리아 타코마 해고자), 총무국, 선전국, 대외협력국이 중앙에서 상근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각 지역 및 그룹별로는 서울, 인천, 경기남부, 성남, 대전, 광주, 목포, 대구, 경주포항, 울산, 부산, 마산, 창원지역과 기아그룹, 한진그룹 등의 모임이 활발한 투쟁을 하고 있다. 이들이 투쟁을 해온 상황은 가시밭길, 지옥길, 용암이 끓는 길 등 흔한 비유어를 갖다대어서는 설명될 수가 없다. 그것은 ‘생활의 불편’정도를 넘어선 극한상황, 죽음과의 대면을 경험해온 과정이었다.
93년 김영삼 정권이 문민의 이름을 걸고 등장하면서 이인제 노동부장관은 “모든 해고자는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온 국민의 박수를 받았고 특히나 해고노동자들은 직장으로 돌아갈 설렘 속에 하루를 손꼽아가며 기다리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희망으로 시작했던 93년은 길고도 고통스러운 행진의 시작이 되었다. 1차 단식투쟁(4월 7일 -23일), 2차 결사 삭발, 단식투쟁 38일(9월 11일 - 10월 18일)에서 보여지듯이 단식자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면서 전국의 사업장을 찾아다니며 호소하고 외치고 항의하고 사람을 모으고 청와대, 노동부, 법무부, 병무청, 경제5단체, 국회, 민자당, 민주당, 국정감사장, 각 지방노동사무소, 그룹 본사, 단위사업장 등등 문턱은 닳느냐 신발뒤축이 닳느냐를 가릴 것 없는 행진이었다. 같이하던 동지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고 머리가 부서지고 팔이 부러지는 상황 고향의 아버님이 자식의 복직탈락을 비관하여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 상황, 직장해고가 가정에서의 해고, 이혼이나 가정파탄으로 이어지는 등 한마디로 기막힌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을 찬찬히 하고 있는 한 해고노동자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힘들어도 항상 웃으려 합니다” “원직 복직이 힘들다는 사실에 신경쓰기 보다는 노동해방에 대한 사상과 희망을 굳건히 지켜내는 것, 지금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것이 버텨올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지원대책위를 꾸리고 도와주신 분들의 노력이 큰 힘이 됐고요”
큰 벽면을 메운 상황판에는 텐트농성, 출근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단위 사업장의 이름들이 빼곡이 차 있고 전화는 쉴새없이 숨가쁜 현장을 옮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들은 일화를 소개해보면, 작년 10월 국회로 행진하던 중에 20여명이 영등포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보도로 평화행진을 하였으므로 연행될 이유가 없었다. 모두들 금식과 묵비로 버텼다. 그러니 이번엔 반대로 경찰서 밖으로 어서 내보내려고 경찰들이 난리였다. 경찰 5-6명이 노동자 1명마다 매달려 들어내는데 경찰서 밖에 지원 나온 농성자들은 경찰서 안으로 도로 들여보내려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치료비의 청구와 책임자의 형사입건을 걸고 재판이 계류중이다. 전해투의 질기고 질긴 힘을 보여주는 예이다. 열려진 문은 많지 않다. 그러나 열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 문은 언제든지 열릴 것이다. 해고와 고용불안은 당장의 해당자에게 뿐만 아니라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함께 인식하는 속에서 함께 하는 싸움으로 전화되야 한다는 바램 속에 “어이, 힘들 내세” 라는 굵직한 붓글씨가 환하게 웃는 해고노동자 의 머리위로 해처럼 떠오르고 있다.
- 126호
- 류은숙
- 1994-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