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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지상중계> 국가보안법 우리에게 무엇인가(1)

적색공포 조장, 인간정신의 불구성 심화

그동안 법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던 국가보안법이 우리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보는 토론회가 1일 오후2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한국인권단체협의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9개 단체 공동주최로 열린 광복 50주년 기념 인권심포지엄 ‘국가보안법, 우리에게 무엇인가’는 여성, 정치, 노동, 언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석, 국가보안법이 피해자 개인에 미친 영향을 넘어 사회전체에 끼친 영향을 진단했다.

기조발제에서 리영희(한양대)교수는 “국가보안법은 특정 집단․계층․개인이 자신들의 통치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며 “이는 과거 중세의 왕권통치와 같은 야만성을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족쇄”라고 표현했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사람의 머리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사상을 재단해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사장시켰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국가보안법이 우리사회 최고의 가치를 반공으로 만들고, 심지어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복종을 미덕으로 삼게하고, 나눔의 아름다움보다 싸워서 쟁취하는 풍토를 조성했다고 지적했다.

주제발표에 나선 연합통신 정일용 기자는 “북한관련 기사를 쓸 때마다 국가보안법이 뒷목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또 북한과 관련해서는 기사의 기본인 사실확인이 불가능해 철벽 앞에 선 것 같다”며 기자로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느낀 어려움을 토로했다.

박원순(참여연대 사무처장)변호사는 중세 마녀사냥과 국가보안법을 비교해 “마녀사냥의 피해자가 약한 여성이었다면, 국가보안법의 주된 피해자는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일본교포나 가난한 납북어부들이었다”며 이 둘은 시대를 초월해 그대로 닮았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이번 토론회는 지금까지의 국가보안법 논의와 다르게 국민의 생활면에서 조목조목 짚었다”며 매우 유익한 자리로 평가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의를 일반 국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심포지엄과 같은 전문가 중심의 행사가 아닌 대중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 심포지엄의 주요 내용을 2회에 나눠 싣는다.


□ 억압과 이탈 -김훈(<시사저널> 편집국장)

최근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유해 발굴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사회는 무고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에 대해 그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접어두고서라도, 심지어 산자가 죽은 자에 대해 베풀어야 하는 최소한의 의전적인 예우조차 수행할 수가 없다. 그들의 사체에 대해 문명사회로써 어떤 최소한의 의전을 표시하는 일조차 ‘우익단체의 반발’을 우려해 불가능하고, 그들의 유골을 결국 야산에 방치될 수 밖에 없는 이 사태의 무력함은 끔찍하다.

우리사회는 과거의 학살과 오늘의 침묵, 그 밑에 깔린 인간정신의 불구성에 관하여, 그리고 인간정신의 자랑인 문화전체의 불구성과 무기력에 관하여 아직 충분한 자기성찰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문화의 불온성이란 그 불온의 내용이 현실의 제도나 지배적 가치나 표현양식을 부인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불온은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의 삶을 더욱 역동적으로 긍정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꾸는 불온이다.

국보법의 반세기는 현실에 대한 인간정신의 긍정과 부정의 상호작용을 파괴했고, 그 두 개의 국면을 적대적으로 분립시켜 놓았다.

국보법은 인간정신과 현실을 적대적 이분법으로 구획하고 있으며, 그처럼 구획된 인간관과 현실관을 인간의 정신작용에 적용해 왔다. 즉, 국보법은 화폭 속의 구도와 표상물 혹은 색깔들과 현실의 구도를 혼동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문화현상이 억압과 이탈이다.

국보법이 상정하고 있는 세계관은 관측소 중심의 세계이다. 국보법의 체계는 방카의 구도와 흡사하다. 그것은 좁은 관측구를 통해 세계 전체를 관찰하려 한다. 그 관측구멍을 통해 관측된 세계는 관측구의 논리와 가치를 통해서 재단되는 것이다. 한점의 관측구와 관측대상이 되는 여타의 세계는 분리․단절되고 만다. 방카는 임시로 구축된 가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강고하고도 완강한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방카를 토대로 해서 역동적인 문화를 건설할 수는 없다.

문화는 그 방카를 문화자신의 힘으로 철거해낼 수 없을 때 방카의 관측권으로부터 스스로 이탈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 이탈의 문화적 현상을 현실에 대한 무관심, 무기력 그리고 퇴폐라고 생각한다.

국보법 적용의 50년 역사는 거기에 저항하려는 인간의 정신을 강화시켜 나간 측면이 있지만, 그로부터 이탈하려는 문화현상을 더욱 광범위하고도 보편적 현상으로 조장해 놓았다.

국보법의 여러 조항의 바탕에 깔린 인간관은 “너는 누구의 편이냐”라는 질문제기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보법이 상정하고 있는 질문의 방식을 “너는 누구의 편이냐”에서 “이같은 질문은 인간에게 타당한 것이냐”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문명한 사회를 염원하는 모든 자유인의 열망이기 때문이다. 또 그같은 질문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인간의 정신은 현실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조합함으로써 역동적인 문화를 건설해 나가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국보법과 적색공포 -오수성(전남대 심리학과 교수)

국보법은 반공이데올로기의 가장 강력한 물리적 담보이자 가장 효율적인 확산수단이었다. 그러나, 반공이데올로기가 이완되고 약화되는 현상을 보이면서 국보법 역시 개폐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국보법의 남용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면서 반공이데올로기의 약화에도 기여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반공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맹목적인 반공과 반북․안보의식의 꽃을 피워내고 있으며 국보법은 무디어진 칼로 다수 국민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 온 국민의 집단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반공이데올로기는 자리잡고 있다.

전쟁 이전세대나 이후세대 모두에게 빨갱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공포로 작용하고 있다. 30년에 걸친 군사정권이 자기의 정권유지 수단으로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면서 적색공포는 하나의 컴플렉스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정신구조의 모순과 긴장이 첨예하면 할수록 내적 적개심은 적색공포로 심화되어 갔다.

이는 ‘희생양이론’으로 설명된다. 이 이론은 어떤 집단이나 대상을 가상적인 적으로 상정하여 그들을 희생양으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통합성이 생기는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대 통치자들은 북한 또는 북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상정하여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를 가진 남한 사람들에게 적색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반공이데올로기를 창출하여 통합의 기제로 사용하였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양을 통해 좌절과 갈등의 돌파구를 찾고 정서적 긴장을 해소할 수 있다. 개인의 무의식에 적색공포가 잠재되어 있어 사람들은 희생양에 대해 내적 적개심을 투사하면 정서적 균형을 얻게 된다. 이것이 오랜 세월 지속되면서 또는 반공 교육을 받게 되면서 하나의 공포로 작용하여 집단 무의식의 내용을 이루었다는 가정도 해 볼 수 있다.

반공이데올로기와 적색공포의 올바른 이해 없이는 남한에 정착된 분단체계의 심층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 적색공포는 내면화되면서 냉전체제가 강제한 상호적대감의 삶의 존재양식을 형성해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그어진 휴전선을 우리 스스로 거둘 때 진정한 심리․정서적 통일의 기반이 만들어질 것이다.


□ 한국정치문화의 발달과 국보법 -손혁재(21세기프론티어, 정치학 박사)

국보법은 작게는 국민 개인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로부터 시작하여 크게는 정상적인 정치활동까지 통제해 왔다. 그러므로 국보법은 국가안보보다는 실질적으로 정권을 반대세력으로부터 지켜주는 정권안보법의 역할을 더 충실히 했다. 국보법을 남용하여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적색혐오증(red complex)의 팽배로 정치활동은 위축되었으며, 보수․혁신 양당 구조의 정착을 억눌러 왔다. 결국 국보법의 남용은 용공음해와 한 쌍을 이루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48년에 발생한 국회프락치사건이라든가, 58년의 진보당 사건은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기 위해 국보법이 적용된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때의 국보법 구속자 통계는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61년부터 80년까지 국보법 위반자가 1천9백68명인데 비해 반공법 위반자는 무려 4천1백67명에 이른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후 61년 새로이 강화된 반공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또, 62년 국보법이나 반공법의 위반 사례가 줄어든 것은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정치인들을 강력하게 규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75년 이후 상대적으로 국보법으로 구속된 수가 줄어든 것은 긴급조치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0년 신군부의 등장 이후 국보법은 반공법과 통합되어 보다 강력한 위력을 떨치게 된다. 80년부터 94년까지 국보법으로 구속된 이들은 3천6백3명으로 90년을 기점으로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된 자보다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된 수가 더 많아 역전되었다.

국보법의 적용은 선거 시기에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이 시기에 일반적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나 국민에 대한 직접적 통제를 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보법 사건을 터뜨려 적색 공포증을 유발시킴으로써 사회의 전체적 분위기를 보수화 시켜 선거에서 여당의 승리를 도와주는 구실을 하곤 했다. 이런 적색공포증을 유발하여 정적을 패퇴시키려는 행태는 현 정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다. 광주시 이윤정 시의원과 오종렬 시의원 구속이나 외국어대 박창희 교수 사건, 6.27 지방선거 당시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좌익활동설 등의 유포가 그것이다.

국보법은 반민주악법의 상징으로서 집권자의 자의적 운용에 의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단히 제약, 유린하였으며 고문과 용공조작을 일상화시켰다. 또, 불고지죄는 국민들간의 상호감시, 밀고체제를 조장하여 인륜을 파괴하고 민족공동체적인 삶을 파괴시켜 왔다. 또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체제와 정권의 유지, 확대를 위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무소불능의 탄압도구로 악용되어 왔다.

대부분의 국보법 위반사례는 참혹한 고문 등에 의한 조작사건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국보법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독재를 지켜왔다는 사실을 이제 국민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