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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 김정인의 인권이야기 ◑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 잡기

뜨거운 여름햇살이 시들해질 무렵, 고영구 국가정보원장이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아래 발전위) 구성을 제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현대사를 전공하는 학자에게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의 존재는 때때로 좌절과 무력의 벽이었다. 현대사의 굴곡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암약하면서, 결국 정보까지 독점해버린 그들 앞에서 '사실'을 추구한다는 것이 종종 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규명의 압박에 시달릴 때마다, 커다란 공룡 몸집의 악마가 '나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뒤에서 음흉한 표정으로 덮치는 악몽에 시달리는 일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국정원이 자신들의 오욕으로 점철된 과거를 청산하겠다고 나서다니, 시대변화를 실감하면서도 파격적인 까닭에 또한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 진실을 호도하는 장벽에 가려, 매번 좌절했던 기억은 정보 독점이 와해되고 그것이 '사료'될 수 있는 호기를 놓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수반했다. 시민단체의 고민은 오죽했으랴!

몇 달 뒤, 마침내 초겨울의 길목에서 발전위가 발족했다. 그간 국가보안법 폐지와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논란이 한반도 남단을 들끓게 만들었건만, 유독 오히려 이 문제만은 비딱한 언론의 시선을 용케 피하면서 진행되었고, 그 첫 단추를 낄 수 있었다. 저항이 의외로 적다는 것이 기이할 따름이다.

고심 끝에 이 '역사적 악역'을 서슴없이 맡아준 민간위원들이 정해졌다. 오충일(위원장, 목사),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손호철(서강대 교수), 이창호(경상대 교수), 문장식(KNCC 인권위원장), 곽한왕(천주교인권위 운영위원), 효림(실천승가회장), 김갑배(대한변협 법제이사), 박용일(변호사) 등 10명. 섣불리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야만 하는 길을 선택한 그들의 면면이 일말의 기대를 갖게 한다. 학자나 시민운동가들이 가지는 기대와 우려는 여기서 새삼 논할 필요 없이 분명하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오충일 발전위 위원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옛말에 중이 제머리를 못 깍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들어가서 깍아줘야 한다. 단, 어설프게 깎아서는 안 된다. 손을 대면 확실히 해야 한다. 자료를 안 내놓고 버티면 미련 없이 툭툭 털고 나올 것이다. 우리가 어물쩍 넘어가거나, 국정원의 들러리나 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발전위는 앞으로 진행될 과거사청산과 관련된 일련의 투쟁의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굳이 투쟁이라 한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포함한 과거청산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이제 기득권 세력과의 치열한 전투가 되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에 똬리를 틀고 있을 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시기를!

◎ 김정인 님은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