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경찰들에게 무척이나 바쁜 한해가 아니었나 싶다. 화성 살인사건, 부천 초등생 사건, 유영철 연쇄 살인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채워진 한해였다. 이런 가운데 수사인력의 부족, 수사관들이 사비를 털어 활동해야 할만큼 열악한 수사 지원 체계 등으로 인해 경찰 내부에서는 수사 업무보다는 특진이 용이한 다른 업무를 선호하는 경향마저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런 경찰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좀 더 편리한 수사, 좀 더 과학적인 수사일 것이다.
이런 한국 경찰이 꿈꿀만한 이상적인 모델이 있다. 바로 문화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이다. 시 외곽 어두컴컴한 건물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것은 물론 소지품 중에서도 마땅히 증거물로 쓸 만한 것이 없는 난감한 상황이다. 이때 "짜자잔" 하고 CSI 과학수사대가 나타난다. 그들은 시신을 치밀히 조사한 결과 여인의 체모와 함께 시신에 박혀있는 손톱 한 조각과 치열 자국을 발견한다. 장면이 바뀌고 하얀 가운을 입은 수사관이 머리카락과 손톱 조각에서 DNA를 추출해 내 피해자 여성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또 피의자의 것으로 짐작되는 손톱조각의 DNA를 인근 지역 범죄경력자들의 리스트와 대조한다. 마침내 수사망이 좁아지며 한 남성이 피의자로 지목되고 어느 날 영장을 앞세운 가택수사에서 압수된 칫솔의 DNA를 대조한 결과 그 남성이 실제 범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최후의 '확인사살'을 위해 미모의 CSI수사관이 피의자 남성을 만나 조용히 영장을 들이민다. 영장 앞에서 피의자 남성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유전자 정보가 담긴 타액-침-을 제공한다. 마지막 장면은 고개 떨군 가해자의 모습이다. 너무도 명백한 과학적 증거 앞에 자백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가택 수사나 피의자의 생체정보 수집을 위해 일일이 영장이 필요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CSI 과학수사대는 어쩌면 우리 나라 경찰이 꿈꾸는 '강력한(?)' 경찰에 대한 훌륭한 미래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문과 필적 대조는 물론이고 유전자를 확인하기 위한 연구실을 방불케 하는 첨단 장비, 관공서라는 것을 조금도 떠올릴 수 없는 번쩍번쩍한 사무실. 여기에 과학수사라는 이름으로 인근 지역 범죄경력자들의 기본 정보가 다 정리되어 있는 수사 시스템. 핏대 세우는 대질 수사가 아닌 현장의 증거물과 피의자의 유전자만 대조하면 만사 오케이인 편리한 수사. 참으로 수사관들의 천국이라 할 만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첨단 문명으로 치장된 '과학'수사의 화려함은 결국 수사의 편리함을 위한 것일 뿐, 수사 과정에서 인권의 자리는 점점 작아진다. 예컨대 전과자들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이중 처벌 방지' 따위는 이 드라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범죄자는 언제나 예비 범죄자로 등록되어 이들의 모든 개인정보는 데이터베이스로 모아진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인권 침해인지는 범인을 잘 잡는 멋진 경찰의 과학수사 앞에서 잊혀지고 만다. 또한 사건을 수사할 때마다 관계자들로부터 수집되는 생체정보가 수사 종결 후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 드라마는 침묵한다.
문제는 이런 드라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과학' 수사가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인식하게 되고, 심지어는 이를 어서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선 수사관들의 수사에 관한 교육이나 인권 교육, 총기 사용 등에 대한 교육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우리의 실정을 생각할 때 과학수사가 도입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일정부분 인권 침해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수사 과정의 합리성과 잘 짜여진 수사 시스템, 영장주의와 같은 최소한의 법치주의 준수를 의미하는 '합리적 수사'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개인의 고유한 생체 정보를 함부로 데이터베이스 하는 '과학수사'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첨단 과학수사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경찰의 어깨너머로 고도화된 감시 사회의 징후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연말 검찰에서는 형이 확정된 범죄자의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작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제는 한술 더 떠 피의자의 유전자를 검사 또는 채취하겠다는 발상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재미있는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가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날 날은 멀지 않았다. 과연 현실의 과학수사대가 드라마만큼 즐거울 것인가? 철저한 영장주의와 증거물 채취에 대한 엄격한 태도, 피해자는 물론 피의자도 존중해주는 드라마 속 수사관의 모습은 뒤로한 채 과학수사의 일면만을 성급히 서두르는 경찰의 '과학'수사 맹신 앞에 개인의 신상정보에 이어 생체정보까지 고스란히 넘겨야 할지도 모를 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 2766호
- 프라이버시,물구나무
- 안티고네
- 2005-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