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인권실천시민연대는 병사들이 알몸으로 얼차려나 이른바 '원산폭격' 등을 받고 있는 사진 88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그러자 상당수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알몸 사진들을 옮겨 실으면서 군대내 인권유린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제보자로부터 받은 수십 장의 사진을 언론에 전달한 인권실천시민연대는 군내 인권유린이 만연하고 있음에도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군대 지휘관들의 인식이 문제라고 판단, 이번 사진 공개를 결정했다고 한다.
피해자 얼굴 그대로 언론에 전달
이날 언론에 공개된 대부분의 사진은 얼굴과 성기 부분에 모자이크 처리를 한 채 병사들의 표정을 글로 전했지만, 일부 사진은 예외였다. 많은 언론에서 연병장에서 알몸으로 얼차려를 받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먼 거리에서 찍은 사진을 아무런 모자이크 처리 없이 공개했고, 심지어 <오마이뉴스>는 알몸으로 트럭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이 낱낱이 드러나는 사진을 그대로 실었다가 나중에서야 모자이크 처리했다(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기사는 지금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그대로 뜬다). 애초 인권실천시민연대측이 제보자로부터 전달받은 원본 사진에 아무런 처리도 하지 않은 채 언론에 제공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사가 보도되자 이 단체 홈페이지에는 관련 사진을 보기 위해서인지 많은 방문자가 잇따랐고, 게시판에도 여러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유게시판 글 중에는 사진 공개와 관련해 왜 사진 속 병사들의 인권은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 단체의 경솔함을 비판하는 글도 몇 건 올라왔다.
이에 대해 인권실천시민연대는 29일 홈페이지에 해명글을 실어 자신들은 "일반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려거나 또는 사진에 등장하는 장병들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그들의 초상권, 프라이버시 등 인격권을 침해하려는 의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어 "비록 저희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 포털 사이트 등에 자극적인 표현으로 문제의 사진 몇 장과 기사가 실리게 되고 이 때문에 보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 기사와 사진을 접하게 되신 많은 분들께도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해명글은 안타깝게도 이번 사진 공개가 왜 잘못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 병사들 고통과 존엄성 충분히 고려했나
이번 사건은 인권침해 사실을 밝혀내고 널리 알림으로써 진행중인 인권침해를 중단시키거나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이 자칫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인권실천시민연대는 군대내 인권유린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하는 좋은 '의도'에서 사진 공개를 결정했다. 그렇지만 이 단체는 '피해 사실'에 대해서는 적극 고려했으되, 당시 피해자들이 받았을 인간적 모멸감이나 사진 공개로 빚어질 수 있는 제2, 제3의 피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만약 피해자들이 당했던 고통에 대한 충분한 공감이 있었더라면 해당 사진을 언론을 비롯한 제3자에게 보여주는 데 좀더 신중했을 것이다. 나아가 고민 끝에 사진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취한 다음, 언론에 전달했을 것이다. 특히나 그 사진이 다중이 접근하고 대량 퍼나르기가 가능한 언론이라면 마땅히 그런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더구나 인권실천시민연대는 사진 속에 등장하는 피해자들 개개인에게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고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은 언론이 문제를 키운 셈이지만, 애초 이 사진을 원본 그대로 공개한 행위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 해명하더라도, 피해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 피해를 준 것이며,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피해자들을 눈요깃거리로 전시하는 사회
한걸음 더 나아가 아무리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끔찍하거나 수치스러운 장면이 담긴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피해의 심각성을 전하고자 하는 운동방식이나 언론의 태도에 대해서도 되짚어보아야 한다. 피해자들은 물론 보는 이들에게도 수치심과 모멸감을 자극하는 피해사진을 공개하는 행위는 피해사실의 심각성에 집중하기보다 피해자들을 한낱 눈요깃거리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다. 특히 이러한 사진이 선정성에 기대 기사를 팔아먹는 언론이나 다중 앞에 공개될 때는 그 위험성을 거의 피해가기 힘들다.
얼마 전 강릉경찰서 전투경찰대의 '알몸 진급 기념식'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인권침해 논란이 빚어진 적 있다. 병사들을 발가벗겨 놓고 희롱거리로 삼는 행위도 문제지만, 당시 현장을 담은 사진이 인터넷에 버젓이 게재되고 무차별적으로 유포된 것도 인권침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들과 관련해서도 수치심과 모멸감에 떠는 알몸의 병사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기념사진'을 찍어댄 행위를 적극 비판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도 이런 사진들을 인권단체가 언론에 전달하고 이를 언론이 받아 버젓이 공개한다면, 사진 촬영 행위를 비판할 근거도 힘을 잃어버린다.
지난 5월 온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신생아 학대 파문에서도 대다수 언론들은 신생아들을 장난감처럼 학대하고, 학대 피해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린 간호조무사들을 나무라면서도 피해자인 신생아들의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그대로 싣는 이중성을 보여준 바 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학대 피해 신생아들의 사진을 한 곳에 모아둔 사진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폭력 피해나 아내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피해 여성에게 또 다른 피해와 굴레를 안길 수 있는 피해 사진을 언론에 배포하거나 거리에 전시하지는 않는다. 9.11 테러가 낳은 심각한 피해를 알리기 위해 당시 현장에서 처참하게 찢겨진 채 죽은 백인 피해자들의 사진이 공개된 것을 본 기억은 없다. 다만 쉽게 눈요깃감으로 '전시'되는 피해자들은 윤금이 씨(성매매 피해여성), 학대받은 아이들, 이름 모를 이라크 포로들, 포탄을 피해 달아나는 제3세계 사람들, 인간의 대열에도 제대로 끼지 못하는 이름없는 병사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 이라크 전범 민중재판에서 아브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있었던 이라크 포로 학대 관련 사진을 증거물로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피해 사진을 제3자에게 전달하는 행위, 피해 사진을 언론에 싣는 행위와 관련해서는 아직까지도 명확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인권실천시민연대가 저지른 오류는 많은 운동단체들과 언론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이기도 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피해자들의 인권에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 피해자들을 전시함으로써 피해사실을 부각시키는 일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