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에서 뒤쳐졌을 뿐"
서울역에서 만난 박창재(가명) 씨는 외환위기 전까지 서울역 근처의 월세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는 서울역에서 지내는 노숙인들 보면 게으르고 한심해보였어요. 그런데 노숙하면서 보니까 안 그래요. 노숙인들은 경쟁에서 뒤쳐졌을 뿐이지요."라며 창재 씨는 "노숙자가 아니라 홈리스라고 불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김성일(가명) 씨는 1년여 노숙생활을 하다가 영등포 쪽방에 살기 시작했다. "80년대 초에 귀금속업을 해서 돈을 모았죠. 그때는 기숙사에 살았고. 사실 기숙사라고 부를 것도 없고 작업장의 기구들 한쪽으로 치워서 거기 자는 거였어요." 그래도 성일 씨는 "남들 다 자는 시간에도 두세시간씩 자면서 기술을 연마"해 전세방을 마련했다. 당시 장사를 시작했다가 사업이 실패하면서 결국 20년 전의 '집'으로 돌아온 셈이다.
아방궁, 집 아닌 집
"공안들이 때만 되면 내쫓고 지하도에서는 동료들끼리 싸우기도 하니까 편안히 쉴 수가 없어요. 사람들 시선도 불편하고." 창재 씨가 전하는 "노숙의 불편함"이다. 친아버지도 노숙자였다며 노숙의 '경력'을 내세운 이원영(가명) 씨는 "지나가며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잠을 자기가 쉽지 않아. 쪽방에서라도 살 수 있으면 좋겠어." 하며 목소리를 떨군다.
"노숙할 때는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영안실 음식들을 먹기도 했지. 지금도 그 영안실 음식 맛을 잊지 못해." 성일 씨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쪽방은 아방궁"이라고 표현한다.
쪽방은 보증금을 내지 않고 월세를 선불로 납부하는 곳이라 보증금, 전세금 마련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당장 아쉬운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의동 쪽방에서 20년 가까이 지낸 이민웅(가명) 씨는 "창만 열어도 바깥 소리가 들어와서 닫고 있을 때가 많아. 그러니 환기도 안되지, 여름에는 워낙 더워서 사람들이 아예 노숙을 하기도 해." 라며 쪽방의 현실을 전한다. '폐결핵, 늑막결핵 후유증, 영양실조, 건선, 알콜성 간염' 등의 병명들이 나열된 진단서를 내보여준 전명국(가명) 씨. 환경이 이렇다보니 "이 정도 가지고는 이 동네에서는 쪽팔려서 말도 못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평 반의 방을 3개로 쪼개서 만든 게 여기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화재라도 나면 금새 번져." 역시 돈의동 쪽방에 사는 김경남(가명) 씨는 쪽방이 안정적인 공간이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쪽방지역 주민들이 대개 그렇듯 "노가다라도 뛰어야 하니까 인력업체들 많은 이 동네"를 떠날 생각을 하기는 힘들다. 떠날 생각을 한다고 쉽게 떠날 수 있는 공간인 것도 아니다.
아무도 집을 지탱할 수 없다
지금은 국민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김남구(가명) 씨는 영등포 쪽방지역에서 회자되는 인물이다. 영등포 쪽방의 철거 당시 철거보상금을 받은 120여명 가운데 임대아파트 입주에 성공한 13가구의 한 명. 그는 기초생활보장수급과 장애수당, 노점으로 번 돈에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덕분'에 받은 교통안전공단의 후원금이 있어 영등포 쪽방이 철거되던 때 보증금을 가까스로 마련할 수 있었다. 노숙과 쪽방을 전전한 3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
"93년에 심부전, 당뇨, 디스크 판정을 받아서 그때부터는 소일밖에 못했"던 민웅 씨는 방세가 밀려 쫓겨나기도 하다가 올해 4월에야 기초생활보장수급대상자로 선정되었다. "34만 5천원 받어. 거기서 월세로 21만원 나가고 쭉 밀린 방세까지 계산하면 3만5천원으로 한 달 살아야해. 여기 사람들 대부분이 일용직이야. 솔직히 소개비 빼면 하루 일당 3만원 정도밖에 안돼." 그나마 일을 구했을 때 이야기다. 경남 씨는 "일을 하려고 해도 일이 있어야지. 물건 떼다가 노점도 하다가 취로사업 같은 데도 나갔다가 하면서 어떻게든 버티는 거지."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누가 그들의 '집'을 지탱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돈의동 쪽방에서 생활하는 650여명 중 기초생활보장을 받는 이들은 164명에 불과하다. "쪽방에 사는 분들이 돈을 모아 이 지역을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일자리 따라서 떠나더라도 다른 지역의 쪽방으로 가는 것일 뿐 쪽방생활 자체를 벗어나기는 힘들죠." 돈의동 쪽방지역에서 '사랑의 쉼터(쪽방 상담소)'를 운영해온 오범석 소장이 지켜본 현실이다.
집다운 집으로 가는 길
임대아파트에 들어간 남구 씨는 재활훈련을 위해 작은 방에 운동기구도 몇 가지 마련해놓고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한다. 쪽방에서는 엄두도 못 내던 일이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운동 삼아서라도 영등포를 다녀와. 재밌어, 가면. 여기는 와본께 토끼장 같은데서 잠만 자구 말여." 영등포 쪽방지역의 이영훈(가명) 씨는 "마을에 들어오면 악취가 나. 그런데 어떨 땐 그 냄새가 정겨워. 그게 사람사는 냄새"라고 말한다. 남구 씨에게도 철거로 갑작스레 떠나온 곳이 늘 그리운 것. "그래도 예전 살던 데랑 비교도 못하지. 왜냐믄 사람이 마음이 편하잖어. 여기 있응께 내 얼굴이 더 젊어졌다고. 하하"
2002년 현재 공공임대주택 소요가구는 165만 가구로 추정되지만 공공임대주택 재고는 30만호도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임대주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주거비지불능력이나 지역사회 의존도를 고려하지 못하는 임대주택정책은 이들을 오히려 배제하고 있다. 특히, 가족 위주의 주거지원에서 밀려나는 단신가구에 대한 지원책이 필요하다. "나도 (영구임대아파트) 줬으면 글루 가지 일루 안왔다구. 거긴 부부팀만 들어가게 허잖여. 나는 혼찬게 못가는 거여."
오범석 소장은 최소한의 주거공간과 자립을 위한 안정적인 일자리에 알콜치료 등 다양한 사회복지서비스가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활자 특성별로 3개월, 1년, 2년 등의 다양한 임시전환주거를 마련해 필요할 때 언제든 연계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 오범석 소장은 "지역사회를 바꾸는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고 "관은 관대로 실태조사를 통해 데이터를 확보하고 민간조직은 네트워킹을 통해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면서 주거정책에 민간조직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해야 한다"며 현재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다가구 매입임대정책의 방향을 제안하기도 했다.
독일의 홈리스는 '어떠한 숙소도 가지지 않고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 지인이나 친척 집에 거주하는 사람, 자비로 저렴한 숙소에서 숙박하는 사람, 일시적 체재시설에 입소해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 폭넓게 정의된다. 이들은 독일기본법(헌법)의 '자기의 인격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권리', '생명으로서 권리 또는 신체에 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를 위협받고 있는 상태인 만큼 '생활부조를 행하지 않으면 주거를 상실할 위기에 처한 때는 생활부조가 발휘된다'는 규정을 두어 주거상실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또한 주택을 현재 상실한 사람이 홈리스 상태로부터 벗어날 의사를 표시하면 사회주택에 거주하도록 한다. 재택방문형 상담지원활동 역시 병행된다.
'지금, 여기'에 답은 있다
"이 방은 내 공간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라던 민웅 씨의 말은 비좁은 쪽방에 갇히는 것이 몸만은 아님을 짐작케 한다.
"잠자리용 깔개로는 스티로폼이 최고야. 전에 막노동이라도 나갈 때는 공사현장에서 가져다 쓰곤 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여의치가 않네. 차가운 기운 막을 수 있는 은박매트 하나랑 그거 보관할 사물함 하나만 있으면 좋겠구만." 그러나 원영 씨의 소망은 절망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창재 씨는 "소몰고 풀뜯으며 놀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방한칸이라도 있으면 고향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한다.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이들에게는 절망과 희망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여기 주민들은 세상의 낙오자, 패배자예요. 하지만 재활의 의지가 없지는 않아요. 일을 주선하고 서로 도우면 세상으로 돌아가는 기간이 단축될 수 있어요."(성일 씨)
"자동차 정비나 목수나 건축 같은 거 배워주고 거기 맞는 직업을 찾아줘야 자립할 수 있죠."(창재 씨)
"돈보다 방을 하나씩 줘서 살림하면 그게 낫지. 쓰지도 못하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어."(남구 씨)
"방한칸에 부엌, 욕실, 화장실 있는 8-9평 정도 되는 방, 월세는 10만원 정도 받으면 좋겠네요."(창재 씨)
지금, 여기 모든 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
덧붙임
소연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신자유주의와 인권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