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정치적·계급적 역학관계를 반영한 일종의 '휴전협정'입니다. 헌법을 민주주의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을 때, 중층적 제한 사유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기본권을 실질화할 수 있는 방안과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새로운 권력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이 진지하게 성찰되어야 합니다."
8일 인권단체연석회의(아래 인권회의)의 초청을 받아 강연에 나선 국순옥 교수(민주주의법학연구회 고문, 인하대 명예교수)는 헌법 재구성을 위한 실천 과제를 이렇게 일갈했다. 한국 진보 법학계를 이끌어온 국 교수가 4시간 가까이 헌법 기본권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기초를 풀어나간 이날 강연에는 50여 명의 인권활동가들이 함께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제안 이후 최근 정치권에서는 내각제 도입, 대통령 임기 단축, 선거구제 개편 등 개헌 논의가 들썩이고 있다. 내년이면 본격적인 개헌 국면이 도래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정치권 안에서의 물밑 협상 결과에 머무르기 쉬운 개헌과정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 핵심 개헌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사회적 의제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운동 진영이 헌법체제에 대한 실천적 개입을 목표로 대응에 나선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헌법보다 민주주의다"
무엇보다 국 교수는 헌법을 중립적 문서로 신화화하는 관점을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헌법을 객관적이고도 자기완결적인 논리체계를 가진 문서로 바라보는 것, 헌법 해석 행위를 정치에서 벗어난 중립적 인식활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는 게 국 교수의 주장이다. 대신에 그는 '역사주의적 관점'을 내민다. 이 관점에 따르면, 헌법과 헌법의 기본권 체계는 역사적·정치적 산물이며, 헌법에 대한 '해석' 역시 헌법 질서의 형성에 기여하는 정치적 실천행위이다.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론을 내세워 의회를 통과한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해 위헌을 선고한 사례를 떠올릴 때, 이 관점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 연장에서 국 교수는 입법권력도 헌법 이념에 구속돼야 한다는 '입법자구속설', 나아가 헌법 이념의 해석을 독점하고 있는 헌법재판소가 가진 위험성을 지적했다. 국 교수에 따르면, 입법자구속설의 등장은 20세기초 독일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의회 다수파를 차지한 역사적 상황에서 평화적 체제 이행과 개혁 입법의 가능성을 사전 봉쇄하기 위한, 일종의 '법이론적 쿠데타'였다. 이 경우 헌법 이념이 무엇인지를 해석하는 헌법재판소의 존재가 필수적이게 된다. 결국 "민주주의의 도전을 받은 부르주아사회가 의회에서 다른 곳으로 권력의 중심축을 이동함으로써 현실 유지를 꾀하려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헌법재판소"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라는 제왕적 권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헌법을 최고 이념이라는 절대적 지위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게 국 교수의 주장이다. "입법권력이 민주적으로 재구축된다는 전제 하에서 헌법도 입법권력을 구속할 수는 없다는 입장에 서는 게 역사의 진보라는 장기적 구상에서 볼 때 더 바람직하다"는 것. 또한 헌법에 규정된 추상적 기본권이 제도적 장치를 통해 실질화되기 위해서도 구체적 입법행위가 필수적인 만큼, 입법권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입법권력에 대한 강조가 곧 '대의제 의회의 강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날 강연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대의제를 넘어선 입법권력은 가능하고 가능해야 한다. 국 교수가 제안한 입법권력의 민주적 재구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내고 구체적 실현과제를 이끌어내는 일은 공동의 몫으로 남아있다.
개헌국면,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그렇다면 인권진영이 개헌 과정에 전략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일까. 국 교수는 그 동안 헌법의 개정 과정이 중대한 사회적 재편성 과정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냉소적인 헌법허무주의를 경계해왔기에 아래로부터 헌법을 다시 쓰고자 하는 흐름을 무용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헌법의 절대화라는 편향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날 국 교수는 외국 헌법을 모방하여 짜깁기해 온 헌법 기본권 체계 내의 내적 통일성을 확보하는 과제와 함께 광범위한 기본권 제한 사유를 삭제시켜야 할 과제 등은 유효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우리 헌법처럼 공공복리 이외에 질서유지, 국가안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등 중층적인 기본권 제한 사유를 둠으로써 기본권이 설 자리를 없애버린 헌법은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가운데 헌법 전문(前文)에 규정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전후 독일에서 이른바 '전투적 민주주의론'(자유의 적에게는 자유를 보장해서는 안된다는 냉전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개념으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도입됐다.
이와 함께 국 교수는 점차 새로운 기본권 침해 주체로 부상하고 있는 사회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함으로써 기본권 효력 혹은 민주주의를 '수평적'(국가와 개인 간의 수직성이 아니라 사인과 사인 간이라는 의미에서의 수평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근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 부상하고 있는 내각제 개헌 구상은 삼성과 같은 사회권력이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더욱 강화할 우려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헌법 개정 과정에서나 입법작용을 통해서도 사회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하고, 법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을 실현할 방안이 모색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입법적 해결이 뒤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사실상 민법상 계약관계에 따라 사법부의 판단을 구할 수밖에 없는 만큼, 사법권력을 민주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제도 주목해야 한다고 그는 제안했다.
존엄과 평등의 헌법, 아래로부터 다시 쓴다
이날 국순옥 교수의 강연은 앞으로 인권단체들이 개헌 대응 전략을 세워나가는 데 참고할 만한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한 자리였다. 국 교수의 강연을 시작으로 인권회의는 앞으로 9차례 추가로 헌법 기본권 세미나를 개최한 뒤, 올 12월 개헌 국면에 대한 대응 방향을 확정할 계획이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핵심 기준에 따라 아래로부터 헌법을 재구성하기 위한 인권단체들의 다음 발걸음은 오는 24일에 이어진다. 자세한 세미나 일정은 인권회의 홈페이지(hrnet.or.kr)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