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등 41개 노동사회단체들로 구성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조합원 감시와 차별로 인한 집단정신질환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는 22일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복지공단(아래 공단) 본부의 산재심사 기각 결정을 강력 규탄했다. 지난달 25일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적응장애’라는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하이텍 여성 조합원 13명은 지난 5월 공단 관악지사의 산재 불승인 결정에 불복, 공단 본부에 재심을 청구한 바 있다. 그러나 공단 본부는 16일 “감시 사찰 등 노조탄압 관련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조합원들의 질환을 직접적으로 유발한 원인이라는 증거는 없다”며 또다시 산재심사 기각 결정을 내렸다.
“업무상 스트레스와 정신질환 관계없다”?
이번 심사를 담당한 공단 본부 자문의사협의회는 기각 사유와 관련해 “CCTV를 통한 조합원 감시나 조합원에 대한 차별과 따돌림, 부당 해고 등은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는 있으나 적응장애를 유발하는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협의회는 “설사 스트레스가 질환을 유발한다고 해도, 직장 내 차별, 감시와 같은 업무상 스트레스 외에 사업주와의 갈등과 같은 업무 외 스트레스가 혼재돼 있는 상황에서 (산업재해로)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 관악지사가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공단 본부는 조합원들의 정신질환 사실과 사측의 노조탄압 등은 인정됐다. 그렇지만 ‘조합원들의 질환과 업무 상 스트레스가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하이텍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 요구를 또다시 거부했다.
이에 대해 공대위는 조합원들의 발병이 업무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공단 본부의 논리는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꼬집었다. 공단 본부의 논리에 따르자면 조합원 13명이 동일한 시기에 각각 개인적인 요인으로 동일한 질병을 얻었다는 것인데,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단 본부가 노사갈등을 업무 외 스트레스로 분류한 것도 문제다. 공대위 법률팀의 권태용 노무사는 “사업주와의 갈등 역시 업무환경과 관련된 문제로, 사업주의 책임이 있는 영역이며 업무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번 공단 본부의 결정은 기존 대법원 판례나 결정례에서도 벗어나 있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르면, 업무상 스트레스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으로 입증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반 사정을 고려해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정되는 경우에도 입증된다. 실제 공단은 2003년 청구성심병원 조합원, 2005년 성람재단 조합원 산재 사례에서 ‘노사갈등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을 산재로 인정한 바 있다. 공대위 이민정(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집행위원) 씨는 “똑같은 노사갈등 스트레스로 질병을 얻었는데도 하이텍 노동조합원들만 유독 산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산재 불승인 결정은 전체 노동자 겨냥한 것”
공대위에서는 두 번에 걸친 공단의 산재 불승인이 ‘사실상의 노동자 길들이기’로 보고 있다. 이 씨는 “작년부터 공단은 산재 승인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느니, 도덕적 해이에 빠진 노동자들이 이를 악용한다는 등의 말을 해왔다”며 “두 번에 걸친 공단의 불승인 결정은 하이텍 노동자뿐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을 겨냥해, 산재 승인 요구나 집단행동에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식 37일째에 접어든 김혜진 하이텍지회장도 “이번 공단의 기각 결정은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라며 “이제 우리 투쟁의 목표는 13명 조합원 전원의 산재승인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공론화하는 것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향후 하이텍 공대위는 △방용석 공단 이사장 퇴진 △근로복지공단 폭력행정 분쇄 △산재보험제도 개혁 △감시, 차별로 이한 정신질환 직업병 인정 등을 목표로 500인 동조단식, 매주 집회와 촛불시위, 1인 시위 등을 이어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