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손에 가졌을 때의 제목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었다. 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그런 우회적인 제목을 가졌고, 저자(고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도 적히지 않은 책이었다. 나는 특정 종교재단에 속한 학교라는 이유로 강제 수강해야 했던 종교개론 시간에 맨 뒤에 앉아 시간을 때우려고 이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수업시간인지라 코와 입을 막고 울먹임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가졌을 때는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저자의 이름도 분명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변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두 번째 책은 경찰의 압수수색에서 불온서적을 소지한 것으로 걸릴 것을 두려워한 친구들에 의해 깨끗이 치워졌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손을 강제로 떠났다.
세 번째로 가지게 된 책의 표지는 깔끔하고 세련되게 바뀌어 있다. 마치 전태일이 고발했던 모든 것이 옛일인 듯 시치미 떼고 있는 사회의 뻔뻔함을 반영하듯이 말이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갖은 돈벌이에 시달리던 전태일은 열여섯 살이 돼서야 야간학교에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생활고 때문에 1년도 채 다닐 수 없었다. 윗글은 그가 짧은 학창시절에서 경험한 체육대회를 마치고 쓴 글이다.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는 삶 속에서도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을 여기서 대면할 수 있다. 스스로를 존엄한 인간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그 누구도 노예로 만들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할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 인권의 교과서적인 선언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권 논의는 이런 선언문 아래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데 머물고 있다. 하지만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압제자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가지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작업이 힘들게 작업시간이 길고 힘에 겨운 야간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공장주인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우리 직공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직공들은 어린아이들 바지를 만들어내는 매수에 따라 월불 계산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미싱사들의 다 같은 불만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1매당 얼마를 준다는 확고한 결정을 하지 아니하고 대목일이 끝난 다음에야 1매당 얼마를 지불한다는 것을 주인이 재단사와 적당히 타협해서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이 바빠 직공들이 매수를 많이 올려도 겨우 평균 월급보다 조금 나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나는 이런 계통에서 미싱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너무 억울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 못자고 많은 양의 바지를 만들어야, 피땀 흘린 대가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인권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모두 똑같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따라서 대등한 인간이다. '형식'으로는 대등한 인간인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통적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은 현실의 인간이 처한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면, 개인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인권의 현실을 무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주인도 노동자도 자유롭고 평등한 대등한 시민일 뿐이다.
윗글은 전태일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처음으로 사회비판의식을 드러낸 글이다. 인권의 변화는 현실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구체적 인간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변화는 인권주체의 구체화와 집단화로 나타났다. 구체적 인간은 누구인가. 자기 재산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임금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 즉 재단사인 노동자이고 시다인 노동자이다. 이들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이들이 사회적 조건을 얘기하려면 이들의 존재를 통해 얘기할 수밖에 없다.
"1개월에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서는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일반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대부분 6년 전후의 경력자들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시간-12시간으로 단축해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그렇게 등장한 구체적 인권이 '노동권'이다. 노동권의 등장으로 인해 전통적 인권이 옹호했던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은 깨졌다. 재산을 똑같은 재산으로 바라보지 않고 누가 어떤 것을 가졌느냐에 따라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보게 된 것이다. 자본가의 소유권은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소유권을 위해 제한될 수밖에 없고, 이 새로운 소유권은 '노동권'이라는 인권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자본가의 재산권에 대해 책임을 묻게 됐고, 사용자의 권리에 대한 제한 규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휴일과 적절한 휴식 없이 일 시켜선 안되고, 공정한 임금을 주어야 하고, 노동자의 자기 보호를 위해 조합을 조직하고 가입하고 활동할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동자라는 인간집단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업주들은 한 끼 점심값에 2백 원을 쓰면서 어린 직공들은 하루 세 끼 밥값이 50원, 이건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다 고귀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입니다.
선생님, 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생물이 아닌, 짐승이 아닌,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 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
선생님, 그들도 인간인 고로 빵과 시간, 자유를 갈망합니다."
'빵과 자유'로 뭉쳐있지 않은 인권은 무용지물이다. 빵, 즉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를 인권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인권이 아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신체의 자유, 사상·언론의 자유같은 자유는 의미가 없다. 사실상 누릴 수 없는 권리를 사람들에게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식권을 지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기이다. 한편 '빵'은 '자유'의 배척물이 아니라 자유를 기본 내용으로 한다. 전태일의 말대로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에는 뭉칠 자유가 필요하고 뭉쳐서 행동할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빵은 자유 없이 실현불가능하다. 그래서 '빵에 대한 권리'를 담고 있는 '사회권'이란 인권은 '자유'의 고양이지 자유의 무시가 결코 아니다. 대표적인 사회권인 노동의 자유가 결사의 자유, 단결의 자유, 단체행동의 자유를 외쳤고 많은 정부가 탄압하는데서 보여지듯 자유없이 사회권의 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권을 흔히 국가가 위로부터 베푸는 혜택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사회권은 노동권이라는 권리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출발했고, 그를 통해 자본가의 재산권을 제한하고 재산의 사회적 책임을 추구한 것이다. 사회권은 노동자를 비롯한 당사자의 자주적 활동을 통해 일차적으로 도모되는 것이고 국가의 역할은 그런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전태일 이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빵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오늘날에는 '노동자'라는 이름도 아까워 '비정규직'이란 이름을 붙여서 노동자를 반토막 취급하고 있다. 이것이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고 또 읽어야 되는 이유이다.
[인용글의 출처] 전태일 평전, 도서출판 돌베개, 조영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