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 판결을 규탄하는 집회에 다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늘어났고, 집회 대오가 차지하는 차선은 점점 넓어졌다. 불어나는 사람들 속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나의 성별이 신경 쓰였다. 내가 이 집회에서 어디쯤에 서있는 것일지 생각했다.
무대에서는 김지은 님의 발언문이 대독되었다. 모든 말들이 허투루 쓰이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마음 아팠다. 끝까지 살아내겠으니 함께 해달라는 김지은 님의 목소리에 응답할 의무를 느꼈다.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그래서 어떤 응답을 해야 할지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1심 판결을 보면서 누나가 직장을 그만두던 때가 번뜩 생각났다. 누나가 원해서 직장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그만두기 얼마 전, 누나의 직장 상사가 바뀌었고, 새로 온 상사와는 갈등이 있다고 했다. 3년을 넘게 잘 다니던 직장이어서 갈등이 있어도 지나가겠거니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는 상사와 크게 다툰 후 모욕적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쏟으면서도 그만둘 때 두더라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누구도 나가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누나는 이미 그때부터 그만둘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갈등과 다툼의 책임은 전부 누나의 몫이었다.
모든 결정은 개인이 혼자 할 수 없다. 퇴사는 누나가 결정했지만 누나가 원한 결정은 아니었다. 갈등을 방치하고 키운 회사,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모욕적인 말을 해도 무관심한 사회에서 누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결정을 했을 뿐이었다. 혼자 책임지는 방식으로 말이다.
"저는 그날 직장에서 잘릴 것 같아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날 안희정의 범죄들을 잊기 위해 일에만 매진했습니다."
김지은 님이 처했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위계가 강하고, 순응을 강요받던 정치인 비서 집단 안에서 가능한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도리어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성인 여성'이 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냐고 피해자를 추궁했다. 피해자를 폭력을 자초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1심 판결은 이 사회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또 누구의 목소리는 듣고 있지 않은지를 보여줬다. 재판부는 안희정의 위력은 인정하지 않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성인 남녀라는 사실에만 주목했다. 최초 여성 수행비서로서의 부담, 임면권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역할, 폭력과 추행에도 침묵해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 이 모든 관계와 맥락은 삭제되고 여성은 그저 권력자의 침실 안에 있던 '성'적인 존재로만 호명되었다. 재판부가 듣지 않은 것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경험이었다. 재판부가 들은 것은 안희정을 비롯한 위력을 지닌 자들의 목소리였다.
"판사님들은 '성폭력만은 다르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그 폭력과 무엇이 다릅니까?"
재판부가 일상에서 발휘되는 위력을 남녀 간의 개인 문제로 축소시킬 때, 김지은 님의 발언문은 한국 사회에 미투 운동이 던진 화두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같은 위력과 폭력을 경험해도 누군가는 응징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참아내야만 하는 사회. 위력이 일상을 파고들어 인간의 권리를 분배하는 구조. 미투 운동은 이 사회가 외면하려하는 경험을 드러내고 위력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구조에 일침을 가했다.
미투 운동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도록 만들면서 동시에 모두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도록 만들었다. 폭력은 잘못이라고 말하면서도 가정에서 폭력은 가정사로, 교사의 폭력은 체벌로, 상사의 폭언은 업무지시로 승인되는 사회.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자고 말하지만 성소수자의 인권은 나중으로, 자국민의 인권은 이주민의 인권보다 앞서 위치시키는 사회. 성폭력도 일상에서 접하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김지은 님의 외침은 여전히 채택되지 못한 또 다른 목소리를 길어 올렸다.
미투 운동이 퍼져나갈 때 나는 조금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싸움을 해나가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8월 18일 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보고, 김지은 님의 발언문 대독을 들으면서 '미투 운동이 바꾸려는 것은 세상이구나. 어느 자리에서든 모두의 문제로 함께 외쳐야 하는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안희정은 유죄다" 이 말을 세상에 확인시키는 것이 모두의 삶을 파고든 위력을 거둬내는 시작이다. 어렵게 미투를 이야기한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가해자는 처벌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
[인권으로 읽는 세상] 미투에 응답하기 위해
[인권으로 읽는 세상] 미투에 응답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