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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탄원서


1. 사건의 경과

피해자 최영미는 저의 셋째 딸로서 사건이 일어난 당시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이었습니다. 당시는 19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이 군사정부의 유혈진압에 짓밟혀 침묵이 강요된 상태였습니다. 제 딸 최영미는 이 시절 새 정부가 저지른 만행에 분노를 느끼는 수많은 대학생 중의 한 일원이었습니다. 영미는 그렇다고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으며, 다만 시국에 대한 불만을 자신의 친구들과의 대화나 서신왕래 과정에서 토로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 6월 10일 오전 7시경 인하공사(안기부 인천지부)에서 왔다는 건장한 남자 3인에게 연행되어 갔습니다.(중략) 지하에 있는 취조실에서 11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영미가 연행된 이유는 친구 강혜에게 1981년 4월 25일 보낸 편지가 어떠한 경로로 안기부에 전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편지의 내용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딸 영미는 11시간 동안 취조 당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협박에 몹시 시달렸다고 합니다. 안기부의 연락으로 큰아들 영호가 안기부에 가서 영미를 데려올 때는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었으며 얼굴이 몹시 창백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영미는 안기부 요원에게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다는 심한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는데, 이로 인한 계속적인 긴장상태와 공포감으로 정신상태가 매우 약화되어 결국 심한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 현재까지 고통 속에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2. 정신분열증 치료과정

1)가족에 의한 치료

영미는 1982년 4월부터 1987년 7월까지 무려 17차례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는데 1985년 인천기독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는 특수치료에 의한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한글도 잊어버리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심한 상태에 놓여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저희 집안은 이 과정에서 가산을 탕진하는 한편 제 남편 최운직이 1986년 화병으로 죽는 등 온갖 고통을 당하였습니다.(중략) 이후 제가 6‧29선언 직후인 1987년 7월 2일 2차 탄원서를 청와대에 보냈으며, 상황이 변화한 때문인지 1987년 9월부터 안기부 인천지부에서 저에게 “영미를 일생동안 책임지고 치료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이후 1992년 말까지 치료비 일체를 부담하며 치료해 주었습니다.(가족에 의한 치료상황 일지 생략)


2)안기부 인천지부 부담에 의한 치료

안기부는 영미를 처음에는 인천정신요양원에 입원치료를 해주다가 1987년 9월부터 1988년 5월까지는 인천정신요양원을 보호자로 하여 용인정신병원에 입원치료 하였으며, (중략) 그러던중 1992년 12월 28일 구월2동 동사무소에서 평생의료보호 1호 진료증을 반납하라는 연락이 와서 그나마 통원치료조차 혜택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치료를 받는데 근거가 된 의료보호증이 안기부의 영향력 하에서 편법으로 발급된 것이고 담당 동사무소 직원이 감사에 적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료증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중략)


3)영미의 최근 상태

(전략) 가끔 정신이 돌아왔을 때에는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기도하는 등 불안한 상태인데 약물치료 정도밖에 못하고 있습니다.


3. 탄원인의 요청사항

김영삼 대통령이 저희 영미를 치료해 주십시요. (중략) 5공 군사독재가 남기고 간 상처를 문민정부가 치유해 달라는 것입니다. (중략) 영미는 분명 정부의 잘못으로 정신병자가 된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 정부는 잘못된 정부였습니다. 이제 문민정부가 통치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1993. 10. 8.
최영미의 모 전진숙(032-467-3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