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구정책에 공식적인 차별은 없어도 민족적 차별은 있다
<편집자주> 지난 3월 31일부터 4월4일까지 '한·일 인권포럼' 참가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인권하루소식> 기자 김수경씨가 고베 대지진 현장을 둘러보았다.
4월1일 현재 고베 대지진으로 숨진 사망자 수는 5천5백명을 기록했다. 이중 재일교포 사망자는 1백50여명이다. 사건발생인 1월17일부터 두 달이 지난 4월3일 한일인권포럼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다가 참사의 그 현장을 방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나가타역 가까이 있는 고배대지진재일교포피해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고베에서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살아온 교포로부터 삶의 터전이었던 고베, 지진과 함께 사라져 버린 생활터전, 그리고 이후 대책 등에 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재일동포 구두산업에 종사
이곳 고베(고효현)지역 중 나가타구는 교포들이 가장 밀집된 지역이다. 해방 뒤 고무신공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온 이들은 50-60년대 구두산업(합성슈즈) 속에서 자립하게 된다. 구두산업은 60년대 후반 급성장했는데 당시 일본 구두산업의 90%이상이 나가타구에 밀집돼 있었고 그중 70%이상이 재일교포들이 운영했다고 한다.
지금도 재일교포 4명중 3명이 학교, 취직, 주택임차 등에서 차별을 경험했다는 통계가 있었던 만큼 그 당시 차별은 더욱 심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교포들은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갔다. 그리고 70년대 이후 구두산업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제3세계 국가로 이동하면서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베대지진으로 이곳 구두산업의 80-90%가 타격을 입었다. 2개월이 지난 지금 그중 40%가 재건되었고 앞으로 50%가량 재건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잿더미 속에서 일본정부의 피해보상대책은 진행되었다. 외면상 보상에 차별은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일본정부가 피해대상으로 잡고 있는 대상은 피난소에 수용중인 피난민에 한정되어 있다. 정부는 10만명으로 피난민을 잡고 있었지만 재일교포만 하더라도 피난소보다는 인근 친척집이나 자동차등에서 지내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아예 베트남민들은 피난소에 머물지 못한 채 따로 텐트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유는 피난소에서 나도는 각종 유언비어 때문이라고 한다. 도둑질을 했다는 등 이들을 괴롭히는 소문과 질시로 피난소에서 반강제로 쫓겨나야 했는데 관동대지진 당시 재일교포들의 처지가 꼭 이러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정부는 이미 사향길에 접어든 구두산업 대신 다른 산업을 이곳 고베지역에 발전시킬 계획을 잡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정부가 짓고 있는 가설주택 위치설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직장과 집이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나가타구에서 30분가량 떨어진 니시구, 키타구에 가설주택을 지은 것이다. 순식간에 집과 직장이 불타버리는 천재지변을 맞은 사람들은 이젠 '나가타구 공동체' 생활마저 버릴 것을 강요받고 있는 셈이다. 일본정부측은 가설주택을 3만호를 지었고, 4월에 1만호를 더짓는다고 하지만 이는 그다지 반가운 소식이 아닌 것이다. 사망자 1백50명중 50%가 나가타구에 살고 있었고, 지진으로 집을 잃은 교포들이 60%, 그리고 5천명의 교포들이 생활의 전망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한다.
복구순위 차별받는 동포들
앞서 말했듯이 일본정부의 피해보상에 차별은 없으나 복구순위에 차별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복구작업에서 우선순위는 산업복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지진이 난 뒤 화재로 인한 불길이 주택가에서 치솟을 때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쳤지만 소방차는 한대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시간 대기업 공장에서 불길이 높이 치솟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너진 도로가 세워지고, 전철은 대부분 복구되었지만 주택가에는 아직도 잿더미 속에서 1월17일 새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민들의 직장문제나 교육문제등은 해결과제로 남아있는 셈이다.
재일교포들이 이번에 절실하게 느낀 점은 사회약자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자신들이 주장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시련이라기 보다는 절망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이번 사건은 아직도 뚜렷한 해결점이 보이질 않는다. "일본인들보다 몇 배나 공들여 쌓은 삶이 단 20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한 교포의 말은 이번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민단, 조총련, 여타 세력의 구분을 넘어 민족대단결의 구제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데 일치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