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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 ② '푸른영상' 김태일 씨

통일을 향한 <분단을 넘어선 사람들> 역사의 사실을 담아내는 카메라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흔적을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추억을 남기기 위해 우리는 그 순간들을 서너장의 사진으로 남기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본다면 김태일 씨가 보내온 서른 넷의 삶은 3편의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남아있다. 봉천동 보라매공원 부근 푸른영상 작업실에서 만난 김태일(34) 씨는 낙성대 장기수 분들을 주제로 한 작품의 막바지 손질을 잠시 뒤로 하고, 다큐멘터리 연출담당자로서의 생활을 들려주었다.


91년 <깃발>로 시작

그가 카메라를 잡은 것은 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91년 부터다. 당시 운동을 같이하던 친구들은 "네 성격상 현장이 맞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통해, 장기적 전망 속에서 작지만 내 목소리를 내고 싶다"며 주저 없이 이 길로 접어들었다.

91년 독립영화협의회에서 주관하는 독립영화워크샵을 수강한 뒤, 수강생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 92년 태백지역 선거에 관한 작품을 만든 것이 첫 작업이 된다. 작품 이름대로 그 역시 <깃발>을 든 것이다.

다음 작품은 직업병의 대명사로 불리는 원진레이온 노동자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38분의 <원진별곡>이 만들어지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1년 6개월.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위해 워크샵에서 강의를 한 김동원 씨를 찾아간 것이 푸른영상과의 인연의 끈을 만들어준다.


김태일 씨가 그린 장기수 문제

세 번째 작업은 93년 3월 6일 장기수 선생님들의 가석방출소에서 시작된다. 봉고차를 타고 다니면서 장기수 선생님들이 계신 곳은 다 쫓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그의 고민은 '현시점에서 장기수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인권' 문제처럼 포괄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93년 8월부터 95년 2월까지 24개월의 작업 끝에 <분단을 넘어선 사람>이 사람들에게 선보이게 된다. 2년간의 시간은 그에게는 지치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으며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작업이었다고 고백했다. 빨치산 자료가 워낙 방대해서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하기에는 벅찬 일이기 때문이지만, 한 해가 다르게 기억력을 잃어 가는 나이드신 장기수 선생님들을 대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초조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해지곤 했다. 자료는 역사의 한 부분인데 우리나라는 그 부분을 너무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촬영활동을 해오면서 가슴아픈 일이 많다. 무엇보다 그것은 촬영할 때마다 한 분씩 세상을 등지는 것이다. 원진레이온에서는 김 씨가 촬영했던 노동자가 자살해 숨졌고, <분단을 넘어선 사람들>을 완성하기도 전에 장기수 윤기남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촬영도중에 들려오는 비보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의 무게만큼의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듯이 김태일 씨도 좌절을 느낄 때가 많다. 절망감은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큰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6월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대표 김동원 씨가 불구속 수사를 받았고 이와 함께 압수수색으로 1천여 편의 작품과 편집기자재가 압수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뒤부터 그나마 나오던 활동비 40만원은 중단되었다. 푸른영상은 상근자가 9명인데 활동비의 기준이 결혼했느냐의 여부로 나뉜다. 결혼을 했다면 40만원, 미혼은 30만원. 아이가 있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아이 1명당 육아비로 10만원씩 지급된다.

이젠 모임이나 결혼식도 부담스러워 잘 안간다며, 크게 욕심내는 것도 아닌데도 보통사람처럼 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비상금이 없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아프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숨이 막힐 때도 많다고 한다. "내가 선 자리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하루에도 좌절과 희망을 수십번 왔다갔다한다"며 더욱 속상한 것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작품이 많은 사람에게 평가받지도 못한 채 사장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들려준다.


발톱 2번씩 뽑으며 결혼에 골인

그는 작년 2월, 1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지금 부인은 임신 7개월째다. 부인은 봉천동 산동네에서 8년동안 놀이방을 해온 사람으로 지금도 놀이방에서 일하고 있다. 급여는 40만원. 맞벌이 부부의 한달 수입은 80만원인데, 그나마 몇 달 전부터 절반이 줄어든 셈이다. 소개로 만난 부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서로의 생각이 비슷하고, 그가 하는 일에 성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애시절을 그는 '치열하게' 보냈다. 퇴근하고 신림역에서 만나 서초동 비닐하우스촌까지 바래다주는 그 길이 데이트 코스였다. 그들은 신림역에서 서초동까지 그 길을 1년 동안 한결같이 걸어다녔다. 서초동에 도착하면 새벽4시를 넘기가 일쑤였는데, 아내는 발톱이 2번씩이나 빠지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4시간 걸리던 그 길이 1년이 지나니 2시간에 도착할 정도로 익숙해질 무렵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고문피해자에 관한 작품 계획

한국에서 다큐멘터리의 전망은 아직도 어두운 터널 속에 있다. 자본의 제한과 검열, 통제로부터 억압이 따른다. 지난 10여년간 열악한 환경과 법적 투쟁 속에서 역량을 축적할 시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완성도가 얼마나 높은 가보다는 제작하는데 의의가 있는 단계를 벗어난지 얼마 안된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좋은 작품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철칙이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1년간 사무실 운영에 힘쓰며 작품제작 보다는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 뚝심 하나로 스스로를 너무 지치게 하진 않았나 하는 반성과 후배들에게는 닦여진 길을 주고 싶다는 소망이다. 그러면서도 다음엔 고문피해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