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로 인하여 학대와 차별받는 여성을 생각해보라"
<내게 거짓말을 해 봐>의 작가 장정일 씨가 ‘음란문서 제조죄’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을 때 이 소설을 읽어봤다는 재주꾼 몇몇 사람에게 소감을 들어보았다. 난잡하고 변태스럽기는 <거짓말>이 <사라>보다 더 “쎄다”는 것. 그러나 확실히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진지한 문제의식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소감이었다.
재판을 받으러 파리에서 귀국하고 전혀 도망칠 우려 없는 장 씨에 대한 실형선고는 인신 구속 제도의 지나친 남용이며 분명한 인권침해이지만 이 문제를 제외하고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주로 문단 쪽에서 나오고 있는 주장들은 초점이 맞지 않고 있거나 억지스러운 부분이 눈에 띈다.
우선 “성적억압이 있는 사회는 정치적으로도 억압되고 있는 사회”라는 주장은 사실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법정에서 그런 항변쯤은 할 줄 아는, 웬만큼 닳아빠진 포르노 업자들도 포르노현상이란 이 사회의 근원적인 지배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배설물이자 거꾸로 이 사회의 지배구조를 떠받쳐 주는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장 씨가 인정받는 기성문인임을 내세워 그의 ‘예술’에 대한 법적 제재를 비난하는 주장도 자칫 기성문인만의 면책특권을 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로 들린다. 나는 솔직히 왜 ‘예술’에는 포르노 표현권을 주고 ‘청계천 아저씨들’에게는 주지 말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음란성’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따로 성인 책방에서 팔면 된다는 ‘해결책’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제도가 생기면 청계천 등지의 싸구려 포르노를 정식으로 승인해 주는 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 ‘음란성’을 띤 예술작품은 그것들과 같은 진열대에 갇히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 역시 현행 법제도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근본적으로 비현실적이고 어설픈 주장이다. 이 주장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숭상되어 온 ‘사상의 자유시장’논리, 즉 ‘양화는 반드시 악화를 구축’하듯이 나쁜 사상(예술)은 자유시장에 내맡기면 장기적으로는 좋은 사상(예술)에 의하여 구축된다는 천진스러운 논리와 연결되는데, 나는 이런 믿음을 조금도 가질 수 없다. 대중매체가 소수자의 손에 집중되고 논설이나 보도가 갈수록 보수 일색으로 아직도 ‘사상의 자유시장’의 존재를 믿는 현실감각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여성의 비하와 상품화를 버팀목으로 하여 남성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패권을 잡고 있는 이사회에서 포르노가 공식적으로 자유시장에 진입한다면 우리의 대중문화는 당장 청계천식 포르노에 제압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포르노야말로 여성의 비하와 상품화라는 점에 있어서 바로 이 현실의 지배질서의 적자(適子)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단 측 주장의 문제점은 이 악귀 같은 포르노가 항상 함께 편승하고 따라다닌다는 데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오로지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이 문제를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은 ‘사상의 자유시장’ 이념에 투철한 나라이다. 설사 특정 표현(포르노 등)이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국가권력이 이를 제약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으므로 삼가야 한다는 것이 이 나라의 확립된 관례이다. 이런 전통은 치열했던 민권운동시대를 거쳐 표현의 자유를 쟁취한 미국 국민의 값진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려운 싸움을 통해 획득한 그 자유로운 표현 공간에는 지금 방대한 포르노가 요봐란 듯이 들어앉아 있다.
이런 풍토에서 캐서린 A. 매키넌은 포르노에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가 포르노에 들이대는 잣대는 보수주의자가 가부장적 지배질서의 유지를 바라면서 들이댄 ‘건전한 성도덕’이라는 추상적인 잣대와는 완전히 다른 ‘평등’이라는 잣대, 즉 포르노로 인하여 학대와 차별을 받는 여성들의 평등권이라는 잣대인 것이다. 이 참신한 주장은 앞으로 우리의 포르노에 대한 인식, 나아가서는 자유권 전반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 예상된다.
말은 아름다울수록 더 사람을 속이는 법이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지배 의지나 어두운 욕망을 ‘인권’, ‘도덕’, ‘사랑’ 따위 말로 아름답게 치장한다. 이런 속임수를 가려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무기는 ‘평등’에 다름이 아니다. 인권운동은 항상 ‘평등’의 땅을 굳건히 딛고 ‘자유’를 위해 싸움으로써 ‘이권운동’으로의 타락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포르노.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어차피 막을 수 없지 않은가?”그렇다. ‘평등’이 현실이 아닌 단지 말뿐인 사회에 머물러 있는 한에서는 포르노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평등이 현실이며 ‘말뿐’이 아닌 사회에서는, 인종적, 성적 공격이나 성적 비방의 말은 의미가 없는 말이 될 것이다. 인간과 물질과의 성행위, 인간과 종이 쪼가리와의 성행위, 현실 세계의 남자와 비현실 세계의 여자와의 성행위는 사람들의 성적 흥분을 서늘하게 식혀버릴 것이다.”(캐서린 A. 매키넌)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