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최초의 반국가단체 사건이었던 이른바 영남위원회 사건에 대한 법원의 최종 결론은 영남위원회가 반국가단체가 아니며 구속자 15명중 단 3명만이 이적단체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엔 민선 구청장이 포함돼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점인 98년 7월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정치성이 짙은 조작사건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우리는 사건 발생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자들이 이 사건을 철저한 증거 확보에 의한 과학수사의 개가라고 자찬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조직명만 해도 조선노동당 하부조직, 반제청년동맹, 동창회 등으로 네 번이나 바뀌었고, 심지어 검찰은 반국가단체 혐의를 이적단체로 혐의로 공소변경하기도 했다. 수년에 걸친 불법 도청과 몰래카메라까지 동원한 사생활 침해, 변조된 디스켓, 북한동포돕기운동마저 이적활동으로 둔갑시킨 것 등은 계속 무리한 법적용과 수사권 남용이라는 비판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최종 확정판결까지 1년 6개월이 소요된 이 사건에서 공안사건에서도 심증과 자백만이 아닌 명확한 증거가 요구된다는 점, 또 그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의 불법적 관행에 쐐기를 박았다는 점 등은 높이 평가될 만한 부분이다. 이는 공안사건에서 가장 보수적인 대법원조차도 증거주의 원칙을 채택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권개선에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 15명 중 3명에 대해서 이유 없이 이적단체 구성 혐의를 인정한 점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주범들 셋이서 강령도, 규약도, 조직원도 없는 이적단체를 만들었다는 점을 누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결국 이 사건은 자의적인 해석과 적용을 낳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존재, 정치적 목적에 의해 무리하게 조직사건이라도 만들어내는 근거인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는 인권적 요구의 정당성을 극적으로 확인해준 것이다. 그 자체로 인권침해적 요소를 갖는 국가보안법을 두고는 제2, 제3의 영남위원회 사건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