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명의 제물은 서곡에 불과하다
영하 17도의 혹한 속 노숙 농성…농성중인 노동자의 반신마비…그리고 한강철교 위의 외침. "한국통신은 고용안정 보장하라!"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왜 이토록 힘든 싸움에 나선 것일까?
한국통신은 지난해 11월 말 1천명, 12월 말 6천명의 계약직 노동자를 해고했다. "교섭 기간 중 계약해지를 최대한 자제하겠다"는 회사 쪽의 약속은 온데 간데 없었다.
12월 13일 계약직 노동자들이 계약해지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자, 회사측은 서울 은평전화국, 양재전화국, 경북 구미전화국 등 각 전화국별로 계약직 노동자들이 맡았던 전화가설 등의 업무에 대체근로를 투입하거나 이를 도급으로 전환했다. 파업기간 중 파업으로 중단된 업무를 다른 사람이 대체하게 하거나 도급을 주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회
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회사가 이처럼 막무가내인 이유는 정부의 공기업 구조조정 일정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팔아먹겠다는 속셈"
수천 명의 '목줄'을 이처럼 단칼에 잘라버리는 구조조정에 대해 노사 양측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회사측 입장. "글로벌 경제시대에는 중요 사업 분야를 선정하고 나머지는 외주화하는 것이 전반적인 기업의 추세다. 한국통신 구조조정도 같은 맥락이다."(한국통신 기조실 관계자)
"돈이 되지 않는 분야는 우선 도급화 혹은 분사화하고, 나머지 주력 분야만 남겨 알짜 기업으로 만든 후 사기업에 팔겠다는 속셈이다."(한국통신 정규직 노동자 유승덕)
올 2월말까지 공공부문의 '개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거듭된 '교시'는 한국통신의 무지막지한 '인원감축'에 커다란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한국통신 등의 구조조정을 통해 무엇을 얻어내려 하는가? 왜 굳이 한국통신을 사기업화하려 하는가? 노동자 유승덕 씨는 "효율성을 높인다는 건 겉치레일 뿐이다. 정부도 여러 차례 밝혔듯이 다른 부문의 구조조정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공적자금을 확보하려는 게 큰 목적 아니겠느냐"고 풀이했다. 사회진보연대의 송유나 씨는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IMF와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가 강력히 요구해온 사항인데다, 한국통신에 눈독을 들이는 사기업들의 압력도 큰 것 같다"고 말한다. 해외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돈줄을 공공부문의 사기업화를 통해 마련하려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들의 말 대로라면 한국통신, 나아가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은 사기업과 국내외 금융자본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한 포장일 뿐인 셈이다.
다음 차례는 정규직이다
지난 12월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한국통신의 구조조정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제단의 희생물로 올려진 것이 계약직 노동자들이었다. 애초 정규직 노조 역시 '전화가설·고장접수 업무의 도급화 중단'을 요구했지만, 이는 노사 간의 협상 과정에서 슬며시 사라졌다. 그리고 전화가설, 고장접수 업무는 1월 1일자로 모두 도급으로 전환됐다. 정부의 인력감축 지시를 배경으로 한국통신의 계약직 노동자 7천명에 대한 해고가 마무리 된 것이다.
"도급화가 되면서 업무가 사라졌으니 노동자들을 계약 해지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기조실 관계자는 말한다. 일자리가 없으니 떠나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계약직이 하던 일을 도급직으로 전환했을 뿐 '할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좀 더 편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고용관계가 기존의 고용관계를 대체하는 것뿐이다.
"계약해지 된 노동자는 도급회사에 가서 일 하면 고용이 보장된다"는 한국통신 기조실의 관계자의 말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으로 도급업체는 일이 안정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경남 김해의 한 전화국에서 일하던 구 아무개 씨는 도급으로 전환한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도급업체로부터 12월 20일 이후에는 고용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도급으로 전환하면 1개월치 임금과 위로금을 더 주고, 해당업체에 계속해서 일을 맡기겠다"던 애초 한국통신의 약속 역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안전하지만은 않다. 지난 한해 동안 이미 1천2백명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희망퇴직, 명예퇴직의 형식으로 일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다음 수순으로는 선로 유지 보수 업무, 114 전화국, 국제전화국, 영업 분야 등의 분사화가 예고되고 있다. 분사화가 될 경우, 정규직 역시 일부가 실업자로 전락하게 되고 살아남은 노동자는 훨씬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 고용되는 처지가 된다.
구조조정의 수혜자는 누구?
한국통신 구조조정의 수혜자는 결국 누구인가? 인원감축과 매각을 통해 확보된 '선물'은 누구의 손으로 흘러들어 가는가?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바로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며 고된 투쟁의 전선에 나선 것이다. 한국통신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처지가 극단적으로 대비되기도 했다. 정규직 노조마저 비정규직의 잘려나가는 수족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무위로 돌아가는 순간, 그 다음 화살은 정규직을 겨누게 될 것이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주목하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